측은지심은 무기 또는 약점이 된다.
"그 자리 햇빛이 너무 세서 지내기 힘들 거예요."
(그녀에게 이 말을 건넨 이유가 궁금하다면, 14화 그 X들 3-2. 돈이 모이는 곳에 그들이 모인다.)
그녀에게 말을 건넸고, 그녀는 나의 말을 무시했다. 무표정하게 '아.. 그러든지 말든지'라는 느낌으로 나를 거들떠도 안 봤다. 농장에 혼자 왔다는 사실에서부터 그녀는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이미 뜨거운 아침 텐트를 경험해 봤다는 것을 알리 없었고,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만 믿는 '경험 위주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해가 지고,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반짝거리는데도 그녀의 텐트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차도 없이 시골 마을 카라반 파크의 텐트까지.. 무척 고된 여정이었을 거다.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이른 시간이었지만, 산이 없는 호주는 일출과 동시에 아침이었다. 토마토 농장의 일과는 6시 30분부터 시작이었다. '샤'와 '톰'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6시 이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일을 떠나려던 순간 '지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텐트가 열렸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 나오더니 텐트와 조금 떨어진 그늘이 있는 곳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넋 나간 표정으로 아침 햇빛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는 텐트를 바라보았다. '샤'와 '톰' 그리고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토마토 농장으로 향했다.
토마토 농장에서의 일은 몹시 고단했다. 토마토는 바닥에서부터 자라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몸을 ㄱ(기역) 자 모양으로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였기 때문에 허리를 굽혔다 폈다 반복하며 엄청난 난도의 육체노동을 이어나갔다. 점점 허리가 단련되고, 자세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고통스러웠다. 자세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로 성수기를 맞이했다면, 허리가 아파서 돈을 잘 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토마토 수확량이 많아지기 전에 충분히 적응하고, 단련되었기 때문에 성수기에 하루 300달러 이상을 벌 수 있었다.
아무튼 처음에는 일이 많지 않아서 일하는 시간은 하루 4~6시간 정도였다. 일한 첫날, 점심이 조금 지나 숙소에 돌아왔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빨래를 돌리고,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카라반 앞의 그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내가 머물던 카라반은 카라반을 덮는 지붕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 빨래를 널고, 의자를 놓을 공간이 있었다. 즉, 카라반과 카라반 앞의 2~3평 정도 되는 공간이 상시 그늘이었다.
어젯밤 나의 조언을 무시했던 그녀는 하루 종일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나처럼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조차도 '샤'가 아니었으면 지금도 일을 못 구하고 있었을 테니까.
해가 뉘엿뉘엿할 때 그녀가 텐트로 돌아왔다. 해가 지고 나서 텐트에 들어가는 것이 그녀의 전략이었을까? 그러기에 호주의 낮은 무척 길었다. 그녀는 텐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텐트 괜찮아요? 너무 뜨겁지 않아요?"
어제 내 말을 무시했던 그녀이지만, 뜨거운 텐트의 답답함을 공감했기 때문일까, 그녀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그녀는 그제야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뜨거운데, 여기밖에 자리가 없어서요.."
"그렇죠, 그제까지 제가 거기 있어봐서 알아요."
"아.. 그럼 지금은 카라반에 있는 거예요?"
"네, 친구 둘이랑 셋이서 지내요. 여기는 샤, 그리고 톰이에요. 전 알렉스요."
"안녕하세요, 전 니나예요."
그녀는 어제처럼 무뚝뚝하지 않았다. 밝고, 쾌활했다. MBTI가 E로 시작하는 성격이었다. 카라반 앞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농장 올 생각이 없었는데, 시티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농장이 그렇게 재밌었다면서 꼭 가보라고 그래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같이 오기로 한 일행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마음이 바뀌어서 혼자 오게 되었다고 했다.
맥주를 한잔씩 하다 보니 어느새 밤하늘에 별이 쏟아졌다. 아름다운 배경과 함께 청춘 네 명의 시간은 무르익어갔다. 술과 젊음, 그리고 아름다운 밤 풍경과 시원한 바람은 주변의 공기를 완벽하게 그려냈다. 주변은 평화로웠고, 우리의 마음도 그러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우리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역시 텐트 밖에 나와 넋이 나가있었다. 찜통 같은 텐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셋은 그녀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그녀 역시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결과적으로 나쁜 생각이었지만..)
"샤, 톰. 우리 카라반 앞 그늘에 니나보고 텐트 가지고 들어오라고 할까?"
"난 상관없어, 넓으니까."
"나도."
카라반 앞에는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있어서 그녀의 2인용 텐트에 내어줄 자리는 충분했다. 카라반 파크의 규정을 위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곳 주인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상관없다고 했다.
"니나, 괜찮으면 우리 카라반 앞에 그늘로 들어와."
"정말 그래도 돼?"
"응, 여기 주인한테도 물어봤는데 상관없데, 샤랑 톰도 괜찮다고 하고."
"정말 고마워."
토마토 농장으로 출근했다가 돌아오니 그녀의 작고 파란 텐트가 카라반 바깥 구석에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한낮인데도 그녀는 텐트에 머물 수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고맙다며 저녁을 준비했고, 우리는 맥주를 사 왔다. 다시 아름다운 밤이 찾아왔다. 이틀 연속 젊음과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술의 조합은 우리를 매우 가깝게 만들었다. 아주 오래 알고 지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피부와 밝게 웃는 미소는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뜨거운 텐트의 경험을 똑같이 해봤다는 것에서 오는 동질감이었을까, 혹은 연민이었을까? 많은 것이 부족한 농장이라는 곳에서만 느껴지는 끈끈한 우정 같은 것이었을까? 오랜만에 비슷한 또래의 여자와 함께하는 시간은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그녀의 외모가 내 이상형과 닮았거나, 한국의 그녀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곳의 공기는 호주에 도착한 순간 봉인되었던 나의 연애세포를 깨우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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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한 지붕 아래, 카라반의 남자와 텐트 속 여자의 요상한 동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