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주가 되다.
매일 그녀의 텐트가 열리는 소리로 아침을 시작했다.
카라반에서 옆 공간에 텐트 자리를 잡은 지 며칠 후, 그녀도 농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농장과는 다른 방울토마토를 따는 농장이었다. 생각보다 붙임성이 좋았던 그녀는 카라반 파크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과 곧잘 지냈고, 그들 중 누군가가 소개해줘서 농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오후 3~4시에 농장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언제나 그녀가 깨끗하게 샤워하고 머리가 젖은 채 우리를 맞아주었다. 텐트를 열어둔 채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 그녀의 수더분한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텐트를 흔들던 햇살은 그녀의 목선을 하얗게 비췄고, 물에 젖어 까맣게 짙어진 머리칼과 대조되어 나의 시선을 빼앗았다.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싱긋 웃어주는 그녀를 바보처럼 바라보았다.
어느 화창한 주말이었다. 친해진 몇몇 사람들과 바닷가 근처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고기와 소시지를 굽고, 음악을 틀어놓고 맥주를 마시는 단출한 파티였다. 다양한 국적의 남녀 청춘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뜨거운 한낮에 즐기는 맥주에 취기가 올랐다. 낮술은 참 오묘한 기분을 선사한다. 정신은 똑바로 있는데, 몸은 늘어졌다. 뜨거운 열기를 잠깐 식히러 그늘에 주차되어 있던 내 차에 몸을 실었다. 어느샌가 '니나'가 나를 따라왔다.
"응? 왜? 읍"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얼굴을 감싸고, 순식간에 입이 닿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지만,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통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돌발 행동이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충분히 상상했고,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현실이 되었다. 취기가 오른 두 남녀는 꽤 긴 시간, 서로의 촉감을 나눴다.
헤어질 것도 없이 나는 카라반으로, 그녀는 텐트로 돌아갔고,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다.
그녀와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농장에서 일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일상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무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단 둘이 남는 경우가 있으면 그녀는 나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녀의 텐트에서 스킨십을 나눴다.
"우리 사귀는 건가?"
"......."
"..."
어쩌면 유치했을지도 모르는 나의 질문에 그녀는 침묵을 지켰고, 나 역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호주에서 생활한 지 1 년이 훌쩍 넘어가면서 나의 연애 마인드도 서양 사람들의 스타일에 동화되어 버린 것일까. 그녀의 침묵이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설렘은 존재하지 않았고, 외로움이라는 결핍을 채우는 관계일 뿐이었다.
그녀와 스킨십을 하면서 좋기는 하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입술은 맞닿아 있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 벽이 느껴졌다. 그녀와 나누는 것은 촉감뿐이었다. '아무렇지 않아', '외롭지 않아'라고 거짓말하던 나의 몸에게 '지금까지 참느라 고생 많았어'라고 전하는 위로의 어루만짐이었을 뿐. 그렇게 서로를 어루만져주기만 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반대로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려고 한다. 우리 사이의 관계를 정의할 필요는 없더라도, 그녀에게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라났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와중에도 그녀를 챙겨주고 싶었고, 적당히 티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면 조심스레 거리를 두는 그녀였다. 반복되는 스킨십에 마음이 가까워지려 할 때마다 벽을 하나씩 더 세우는 느낌. 잘해주려고 할 때마다 멀어지려고 애쓰는 그녀였다. 둘만 있을 때면 편하게 스킨십을 나누면서도, 누가 있으면 손도 잡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철저히 '우리는 아무 사이 아니야'라고 티 내는 모습이었다.
모든 물질은 뜨거울 때는 팽창하여 붙으려고 하지만, 차가워지면 움츠러든다. 충분히 붙었을 때 완전히 붙지 않으면, 차가워질 때 빈틈은 점점 벌어진다. 그리고 다시는 붙지 못한다.
농장에서 토마토를 따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시간은 불과 3~4개월이었다. 수확량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떠날 채비를 했다. 우리는 모두 한 달 뒤면 제각각 흩어질 예정이었다.
각자 떠날 계획이 구체적으로 세워질 때 즈음, 그녀와 나 사이의 온도는 더 차가워졌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나 역시도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모습에도 나의 마음은 아프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그녀의 텐트가 없어졌다. 그렇게 떠났나 생각하던 순간, 대각선 먼 곳의 카라반에서 나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은 그녀에게 방울토마토 농장 일을 소개해 준 어떤 한국인 형의 카라반이었다. 그녀는 그의 카라반 앞에 텐트를 세팅하는 중이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사이의 요상한 동거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나 보다. 그녀도 불편했을 터였다. 그리고 그녀를 마주칠 때면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의 눈빛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도 느끼고 있었겠지.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보니 두 달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피식, 황당하게도 웃음이 났다.
'아..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미 그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사람들 앞에서 아랑곳 않고 그녀에게 스킨십을 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넘기려고 했지만, 순간적으로 일그러지는 그녀의 표정을 발견했다.
그날 밤, 나는 '일부러' 맥주 2박스를 사 왔고, '일부러' 그녀가 옮긴 카라반의 형에게 같이 술을 마시자고 했다. 마음에서 분노가 끌어올라 그녀가 편한 꼴을 볼 수 없다는 악의는 아니었다. 그 형과도 자주 술을 마시고 노는 사이였고, 조금 짓궂게 굴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곳에서 파티를 열었다. 파티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친한 사람들끼리 맥주 마시고 떠드는 거였다. 그녀는 텐트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텐트를 통해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죽이고 있음이 전해졌다.
그는 술이 취하면 언행이 다소 격양되고 거칠어지는 사람이었다. 술 마실 때면 은근슬쩍 주변의 여자들에게 집적대고 스킨십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중간중간 '니나, 나와서 한 잔 해~~~'라고 외쳤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술이 잔뜩 취해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던 중이었다.
"꺼지라고, 개X끼야. 한 번만 더 들어오면 죽여버릴 거야!!!!"
날카로운 소리가 카라반 파크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녀의 텐트 앞에 그가 멋쩍게 서있었다. 술 취한 그는 자기에게 그의 카라반으로 온 그녀가 많은 것을 허락한 줄 알았는지 그의 텐트에 들어가서 스킨십을 하려고 했고, 술을 함께 마시지도 않아 맨 정신에다,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텐트에서 인내의 시간을 갖던 그녀가 폭발한 것이었다.
카라반 파크를 찢은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하나 둘 나와서 기웃거렸다.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고 그는 쪽팔림을 무마하기 위해 그녀에게 말했다.
"너가 꺼져."
나는 유치했고, 그는 치졸했다. 그녀는 어땠을까? 이런 상황을 만든 건 그녀의 업보라고 생각해서인지 안쓰럽거나 미안함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갈 수 있던 건 나에게 먼저 다가와 키스를 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먼저 작업한 것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너 알렉스랑 뭐 있지 않아?"
"아니?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 뭐.. 그렇다면.."
뭐.. 그 당시에는 그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믿지 않았다기보다 관심이 없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아무렇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씁쓸함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 이 씁쓸한 감정은 사치가 되었다.
그녀가 그의 카라반 앞에서 쫓겨나고 이틀 후, 카라반 파크에 낯선 차량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부랴부랴 차에 짐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들리는 한 단어.
"자기야, 이제 다 실었어?"
그녀의 지난 모든 표정과 행동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숙주가 필요한 기생충이었고, 나는 잠시동안 그녀가 기생하는 숙주였다. 그녀의 키스와 스킨십은 숙주에게 잘 붙어있기 위한 빨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를 데리러 온 그녀의 남자친구를 바라보면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저 숙주가 되지 않았다는 안도의 미소일까, 상상하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된 것에 대한 희열이었을까.
그녀는 그녀가 탈 차 옆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나를 의식했다. 고개를 들어 눈 한 번 마주치지 못하고 부리나케 짐을 실었다. 흩날리는 흙먼지를 뒤로하고, 침을 퉤 뱉었다. 그리고 입을 벅벅 닦았다. 그제야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