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국밥

20240116

by 모래알

감기에 걸려 꼼짝없이 누워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릴 적 할머니가 끓여주시던 김치국밥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감기에 걸렸다면 무조건 김치국밥이었다. 국물용 멸치와 다진 마늘, 신 김장김치를 썰어 넣고 국물이 끓기 시작하면 찬밥 한 덩이를 넣어 팔팔 끓인다. 그리고 곤로불 끄기 마지막에 달걀 한 개 풀어서 국물에 휘리릭 넣고 저어주면 완성이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몇 번 해먹지도 않은 음식인데, 근래 만난 고향 친구가 김칫국을 얘기해서인지 뜬금없이 떠올랐다. 억지로 기운을 내서 혼자 먹을 양을 대충 끓였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거의 반냄비를 먹었다. 아이 때 먹었던 맛이랑 흡사했다. 따뜻한 국밥을 먹었더니 온기 때문인지 그리움 때문인지 그제야 기운이 나고 살 것 같았다.


참 신기한 것은 오십 평생 중 겨우 십여 년 동안 먹은 그 음식이 왜 그렇게 기억이 나는 걸까? 내 인생의 길이 중 불과 1/5 정도인 어린 시절이 왜 나머지 성인이 된 후의 많은 날들보다 더 그립고 아련한 것일까? 가장 순수한 아이 때의 추억이라서 때 묻은 어른이 된 지금 더 그리운 것일까? 성인이 된 후 김치국밥 말고도 먹은 음식의 개수가 수백, 수천 가지 이상은 족히 넘을 텐데 감기에 걸린 날 왜 굳이 3~40년 전 먹었던 음식이 생각나는 걸까? 가장 오래전 기억부터 순차적으로 떠오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어른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시기의 기억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사회로 나오는 순간 우리를 조건 없이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시선은 없으니까. 게다가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이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고 보호를 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래서 어린 시절이 더욱 그리운가 보다.


그럼 결혼을 하지 않고 계속 부모님과 함께 사는 캥거루족은 여전히 부모의 보호를 받아서 굳이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덜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리가 알을 깨고 처음 보는 존재를 엄마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처럼 우리도 어릴 적 기억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꼭 담아두는 주머니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감기에 걸렸을 때 난생처음 먹었던 따뜻한 김치국밥이 좋았던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 국밥의 맛인지 아니면 아픈 손녀를 걱정해서 김치국밥을 끓여주던 할머니의 기억인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지금 내가 만든 것이 할머니의 국밥의 맛이냐고 물어본다면 확실히 그렇다고 말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초라할 수도 있는 음식인 김치국밥은 여전히 맛있고 그리운 할머니를 추억하게 해주는 음식이다.


음식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들었던 음악, 예전에 TV로 봤던 영화나 드라마, 열심히 읽었던 책들, 같이 놀았던 친구들 모두 마찬가지다. 삶의 전체적인 물리적 크기 대비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 속 기억이지만 머릿속에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방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은 사이즈일 것이다. 어릴 적 이야기들을 하나씩 떠올리면 마치 끝이 없는 실타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금 살고 있는 환경과 어린 시절의 환경은 일치하는 부분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왜 시기적으로도 더 오래되었고 지금은 자주 접할 수도 없는 기억들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그렇다고 이 모든 기억을 매일 떠올리는 것도 아니다. 캄캄한 밤하늘에 갑자기 숨어있던 별 하나가 반짝하는 것처럼 어느 날 불쑥 떠오르는 거다. 마치 내가 갑자기 김치국밥을 떠올린 것처럼. 몇십 년간 감기 걸렸을 때마다 김치국밥 생각조차 나지 않았는데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친구처럼 그렇게 느닷없이 나타났다.


강아지는 생후 2달부터 4달까지는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사회화 시기라서 다양한 환경에 노출시켜서 자극을 주어야 한다. 매일 산책을 나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여러 가지 소리, 움직임에 적응을 시켜주어야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경계심과 공격성이 줄어든다. 그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그 효과가 미미하다. 강아지처럼 사람도 세상에 태어난 후에 경험들이 폭발적으로 흡수되는 시기가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뇌리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아 평생 사라지지 않는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이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각인되어 있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강아지들이 냄새로 엄마개를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도 추억하는 날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기억하는 거다. 그날의 냄새와 그날의 표정 그날의 말들 그런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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