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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을 만났을 때 (상)

라디오 소설을 들으며 떠오른 친구와의 에피소드

by 세니seny

<일본어 라디오소설 낭독모임에 참여하다>에서 이어집니다.



얼마 전 엄마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나를 두고 엄마 아빠가 둘이 있을 때 대화가 오고 간 모양인데 엄마 왈, 아빠는 이걸 '엄마 탓'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엄마는 아니 애가 결혼 못하는 게 왜 내 탓이냐며 언성이 높아졌다고 했다.


두 분, 이런 걸로 싸우지 마세요. 참고로 나는 결혼을 안/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부모탓을 해 본 적 없다. 이건 전적으로 내 탓이다. 연애 안 하고 결혼 못 하는 건 내 탓. 끝. 그런데 엄마는 왜 아빠가 자기 탓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본인이 뭘 잘못했냐고 억울해서 편들어 달라고 말한 걸까.


아니면 그냥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었던 가벼운 에피소드 정도로 나한테 얘기한 걸까. 하지만 중간에서 말 전해주는 사람이 제일 나쁘다. 엄마 때문에 나는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일을 알게 되었고 어찌 되었든 남 탓을 하는 아빠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아졌으니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마음 한편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은 돌아가야 했고 앞으로 얼마나 더 험한 말들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걸로 상처받으면 안 돼, 이 정도로 타격 입으면 안 돼,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나를 붙잡아 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이럴 땐 나를 낳아준 엄마, 아빠도 아무 도움이 되질 않는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된 건 두 분의 대화에서 촉발된 것이니 더더욱 그러하다.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와중에도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기로 했다.


이번달부터 일본어 라디오소설 낭독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일본 배우 분이 라디오 소설을 낭독해서 올려놓은 팟캐스트가 있는데 한 편당 분량이 10여분 내외로 짧은 편이다. 1주일에 한 편을 낭독하는데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5일에 걸쳐 낭독하므로 하루 분량은 2분 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이 라디오 소설이 엄청난 작품성을 지녔거나 훌륭한 문장들이 도처에 즐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주에 읽은 에피소드는 꼭 내 이야기인 것만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못한 애매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잘 캐치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상황과 아주 비슷한 혹은 그런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그런 이야기를 만났을 때 '어, 이거 혹시 운명인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야기)이 있네? 나와 비슷한 서사를 가진 사람이 어딘가에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얼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이 라디오 소설은 여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38세의 여성(나와 비슷한 나이대라서 그런지 또 혼자서 엄청 친근감을 느꼈다) 츠키하라 카나코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 한 편마다 츠키하라와 어딘가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에피소드가 이루어진다. 그것이 일하다 만난 사람이든 전 연인이든.


이번주 에피소드는 츠키하라가 일하는 여행사에서 만든 상품을 '여자 둘이서 하는 여행'이라는 콘셉트로 여배우 두 명이 실제로 여행하는 프로그램을 찍게 되면서 생긴 내용이었다. 그런데 실제 현장에 여행사 직원 중 한 명을 보내기로 했고 거기에 츠키하라가 대표로 선택되어 직원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촬영했던 여배우 두 명 중 한 명의 매니저였던 아이코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온 것이었다.


아이코는 촬영장을 어색해하는 츠키하라를 잘 챙겨주었고 그날 촬영이 끝나고 츠키하라와 아이코 그리고 또 다른 여배우의 매니저와 함께 술도 마시고 몇 번 만나기도 했었는데 점점 연락이 뜸해졌다. 그러면서 나왔던 문장이 다음과 같다.


最近思う。
会える時に会っておかないと、友人も知人もすぐに二年、三年経ってしまう。

요즘 들어 생각한다.
친구나 지인도 만날 수 있을 때 만나지 않으면, 2,3년이 훌쩍 지나 버린다고.


정확하게 이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 바로 최근에 있었다. 그녀와 나는 오랜 친구다. 그녀는 참고로 다른 글에도 등장한 적이 있는, 사서교사를 하는 친구 J다.


그녀와 나는 고3 때 만난 친구 사이로 햇수로는 10년이 훌쩍 넘어가는 친구사이이지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지는 오래되었다. 만나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건 정말 한 10년 전의 이야기. 그래도 연락이 끊기지 않고 있는데 그나마 그녀와 취향이 겹치는 몇 개가 있어서 (좋아하는 밴드나 책 읽기 등) 그래서 그나마 지금까지 이어져온 거 같다.


최근에 특히 사서나 책 쪽에 더 관심이 가기도 하고 코로나 전에는 J에게 만나자고 해도 교사 생활에 대학원 공부까지 하고 있어서 시간이 없다고 하니 계속 만나질 못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자기 동호회 활동하고 연애도 하고 했지만.


요새 코로나도 좀 잠잠해지고 해서 만나자고 연락을 했는데... 곧 공연이 있어서 그거 연습을 하고 있는지라 공연 끝나고 보잔다. 그러면서 공연 보러 놀러 오라고 한다. 참고로 그녀는 뮤지컬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고 이전에도 공연을 해서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녀의 공연을 보러 가기 위해서는 원래 잡혀있던 바이올린 레슨 스케줄도 바꾸고 소액이지만 무료공연이 아니라 돈을 내야 해서 돈도 냈다. 게다가 같은 서울인데도 집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이지만 방문했다. 그리고 이런 공연에 가보면 알겠지만 공연이 끝나면 그들끼리 뒤풀이를 가거나 다음 타임 공연이 있기 때문에 정작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하고는 사진 찍고 인사면 나누면 끝이다.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렵다.


공연이 있던 주말이 지나 평일이 되었다. 이제 공연도 끝났고 하니 한번 만나서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하자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겨울 방학하고 보자는 식으로 말을 꺼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내려면 얼마든지 낼 수 있다. 퇴근하고 저녁때 잠깐 봐도 되는 거고.


아,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 한지가 너무 오래되어버렸구나. 그녀가 직장생활을 하고 동호회 활동을 한다 정도의 정보는 가지고 있지만 솔직히 그 외의 생활은 어떤지 모른다. 만나서 느긋하게 들어보려고 했지. 데이트를 하는지 아니면 동호회 외의 또 다른 2,3의 활동을 하느라 바쁜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다른 공부를 하는지.


지금 그녀를 둘러싼 세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만나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세월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나는 더 이상 자기의 시간을 내주면서까지 당장 만나야 할 만큼 중요한 사람은 아닌 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그래서 우연히 만난 저 문장이 더 깊이 콕 박혔다.


그래서 '그래, 그럼 다음에 방학되면 보자' 하고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만날 생각이 없는데 내가 계속 만나자고 하는 것도 부담되겠지. 그리고 분명 겨울방학이 되어도 그녀는 나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딱 그 정도의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을 만났을 때(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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