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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니seny Sep 09. 2023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순간을 발견해 줘서 고마워

  이전글 <결혼식장에서 들려온 배경음악, <Moon River>>에서 이어집니다.





     이게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남자친구 있냐고?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벙쪄있자 그 애는 오랫동안 참고 있던 것처럼 줄줄줄 말을 시작한다. “혹시 부천영화제 갔다 오셨죠? 거기서 봤는데요...”


     얘기를 들어보니 아마 영화제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1호선을 타고 쭉 따라오다가 신도림에서 내릴 예정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지하철을 탈 예정이었는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하철을 쭉 타고 오다가 신도림역까지 와서야 나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떠올랐다. ‘뭐지 이건? 나 지금 헌팅이라는 것을 당한 거임? 그런 거임? 뭐지 뭐지 뭐지? 남자친구가 없기는 한데 뭐라고 말해야 돼?'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길거리에서 보고 한눈에 반해서 따라올 정도의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애매해서 일단 발을 떼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영화제에서 나를 봤다고 했지? 그럼 공통의 화제인 영화제 얘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제 오는 거...
좋아하시나 봐요?



     아마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 같다. 어색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계단을 내려오고 나니 1호선과 2호선을 갈아타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는 지하통로에 도착했다. 갈림길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제는 결정을 해야 했다. 참고로 나는 겁이 많고 모험은 잘하지 않는 편이다. 


     만약 여기서 내가 이 사람에게 연락처를 주고 진짜로 만나게 되어 사귀고 연애하고 결혼하게 된다면? '우리 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나서 우리끼리 영화 한 편 찍었네? 하하호호'라며 영화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지만 역시 나는 나고 사람은 잘 바뀌지 않으므로 거절하는 쪽을 택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건 참 고마운데요, 제가 그쪽이 누군지도 모르고요, 남자친구가 없다고 해도 연락처를 드리거나 그런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인연이면 어디 다른 데서 또 만날 수도 있겠죠. 그럼...”



     위와 같은 대사를 남기고 내가 가야 하는 방향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나중에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환승통로까지 따라오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쉽기도(?) 하다. 만나보고 진짜 개쓰레기 같은 놈이면 안 만나도 되는 건데. 


      나는 '한눈에 반하는 스타일'이라기 보단 굳이 말하자면 '천천히 오래 보아야 예쁘다 / 너도 그렇다'와 같은 인상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얼굴만 봤을 때 '예쁘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지 않는 인상인데 단지 내가 ‘예뻐서’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어왔던 것이다. 정말 나의 생김새가 그 사람의 개인 취향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면 정말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내 추측(?)으로는 아마 지하철역으로 가는 셔틀버스에 탈 때 내 뒤편에서 기다리면서 날 봤던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노래를 들으며 거리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 때 어떤 순간이 있었을 테고 아마 그 순간의 나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봐준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있다.


      당시 나는 남자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연락처를 줄까 하다가 당시에 화제였던 어떤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픽업 아티스트'. 요즘도 쓰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길이나 클럽에서 모르는 여자를 꼬신 다음 잠자리 상대로만 여기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리숙하고 순진해 보이는 내 눈앞의 이 사람이 일생 최대의 용기를 쥐어짜 내서 나에게 말을 걸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런 여자들의 마음을 이용해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놈인지 아니면 연애에 대한 장벽을 깨기 위해 일단 거리에서 본 아무에게나 말을 거는 시도를 하고 다니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는 법.


     그래서 내가 마지막 문장을 붙인 건 아쉬움을 살짝 표현한 것이었다. 오늘 부천영화제에서 나를 봤다고 한다면 또 다른 영화제에서 지나가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혹여나 다른 곳에서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는 연락처를 줄 용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뉘앙스였다. 


     그렇게 우연히 두 번을 만나게 된다는 건, 이 넓은 우주에서 참으로 큰 만남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걸로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뒤로도 부천은 물론이고 전주, 제천 등 셀 수 없이 많은 영화제에 갔지만 그 사람은 다시 보지 못했다. 사실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때 1분도 채 보지 않았으니까.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전부 빼고 워딩만 순수하게 받아들인다면, 처음 본 나에게 예쁘다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내가 확신하는 건, 아까 마지막 영화를 보고 나와서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바라보고 나무를 바라보며 내가 행복을 느끼며 맑게 웃던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봐준 게 아닐까 한다. 그 순간을 발견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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