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뭘까?
우리들은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같이 봉사활동을 한 사이였다. 송내역 앞 상가지구에 있는 아딸에서 떡볶이를 먹고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우리가 처음 모였던 200X년 여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땐 장맛비가 퍼붓다가도 뜨거웠던 한여름이었는데, 지금은 입에서 하얗게 김이 나오고 있었고 추워서 몸을 바들거렸던 것만 뺀다면.
여전히 분위기를 잘 이끌고 똑 부러지며 매사에 적극적인 매니저 A언니
여전히 복스럽게 맛있게 잘 먹고 나와 따로 만난 적도 있어서 친밀하게 느끼는 B 양
여전히 말을 시켜주지 않으면 말이 잘 없는 C오빠
여전히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D양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한 나
함께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200X년 여름,
그 열흘간의 패턴과 계속 똑같은 패턴이었다.
E언니는 그때보다 굉장히 상기되어 있었고
F오빠는 배가 고팠는지 어쨌는지 말이 거의 없었다.
이 모임에서 A언니와 F오빠가 사귀었었고 2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는데 아직 연애를 한 번도 못해봤다고 솔직하게 말했던 C오빠는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어찌나 놀렸던지 당사자도 아닌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 우리 조가 아닌 다른 조의 여자애와 커플이 되어 첫 연애를 했다.
그 뒤로 영화제에 갈 때마다 C오빠는 몇 년간 스태프로도 일해서 현장에서 눈에 자주 띄었기에 나 혼자 반가워하고 때로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심지어 영화제와 상관없는 다른 페스티벌에 갔는데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주쳐서 인사를 한 적도 있었다. 지금 카톡 보니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고 잘 사는 거 같다.
내가 만나는 모임의 사람들은 일정한 패턴이 보이는데 내가 그런 패턴을 만들어내는 것인지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모임이든 옷의 무늬처럼 일정한 패턴이 있다. 술자리에서 취해 있다 보면 ‘어, 이 장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디였지?’라고 생각하면 그건 바로 몇 달 전 모임이거나, 그 전전 모임이거나 혹은 첫 모임에서 봤던 양상들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도 그랬고, 유럽 여행을 같이 다녀온 사람들도 그랬고, 학원을 같이 다녔던 사람들도 그랬다.
내가 어느 모임에 가든 결국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여러 명 모이면 알게 모르게 각자 어떤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항상 주도해서 모임 약속을 잡는 사람, 분위기를 업시키는 역할을 맡은 분위기 메이커 또 누군가는 최신 유행을 알려주는 트렌드세터와 같이 어떤 식으로든 역할이 나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그 모임에 참석하고 있으면서도 주변인 마냥 한 발 물러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분석하는 편이다.
나는 나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드러내긴 하는데 드러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시간은 중요한 요소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볼 시간을 기다려줄 만큼 매력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어디서나 그렇듯 있는 듯 없는 듯한 사람이 아닐까? 나서는 것도 싫어하고 주목받아도 그걸 잘 처리하지 못한다. 마음에 드는 모임이라면 꼬박꼬박 모임엔 참석하지만 술자리에선 혼자 술을 홀짝거리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맞장구를 친다. 이런 나의 성향은 내 이름대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원래 타고난 기질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이름은 한자로 ‘짝'과 ‘빛나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로 이루어져 있다.
나중에 이력서를 수없이 쓰게 되면서 이름의 뜻을 돌이켜보니 내 이름의 뜻은 ‘짝이 빛난다’였다. 처음엔 기분이 좀 이상했다. ‘아니, 내 이름인데 왜 내가 아니라 짝이 빛난다는 거야?’ 하지만 이름 때문이었든 뭐가 되었든 나는 내가 주목받기보다는 옆에서 보조하는 것을 더 잘한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의 그런 점을 잘 봐주고 받아들여 주는 이들도 분명 있다.
내 이름은 흔한 듯하면서도
흔하지 않아서 좋다.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좋다.
그럴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이었다. 교무실에 볼 일이 있어 지나가고 있는데 누군가 “OO아!”라고 내 이름을 불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웃는 모습이 아주 예쁘신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부르고 계셨다. 그래서 선생님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며 무슨 일 때문에 날 불렀는지 궁금해했는데 선생님께선 그저 작년에 가르쳤던 학생이 지나가니까 반가워서 굳이 내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를 하신 거였다.
그날 저녁에 자려고 누워서 오늘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떠올리던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오후의 그 교무실 풍경에서 생각이 멈췄다. 나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튀거나 주목받지 않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들과도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그건 담임선생님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 오후, 특별히 친하지도 않고 아무런 볼일도 없었던 작년 담임 선생님이 그저 교무실을 지나가는 제자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내 이름을 불러서 인사를 해줬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년 스승의 날마다 그 선생님을 떠올렸지만 졸업하고 나서 학교에 찾아가는 것까지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첫 번째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 회사 앞 건물에서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내 앞을 스쳐 지나간 선생님을 알아보고는 뒤쫓아 가서 인사를 드렸다.
평범하고 별다른 특징이 없었으며 졸업한 지 10년이 다 되었는데도 정말 감사하게도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다. 결국 연락처를 교환하고 약속을 잡아 밥을 먹으면서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오후에 있었던 그 일을 말씀드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의 이야기는 이미 한 편의 글로 발행한 적이 있다.
살다 보면 이런 드라마 같은 일들이 가끔 일어나곤 한다. 그래도 아직은 살 만하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와 나의 속도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