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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운 Mar 15. 2021

농식 수어와 청식 수어

한국수어와 수지한국어

오늘은 간단한 문제를 풀고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Q1. 수어는 단어만 알면 금방 잘할 수 있다?


Q2. 한국수어와 한국어는 그대로 통역이 가능하다?



정답은 본문을 읽다보면 아실 수 있습니다.




한국수어

농인이 사용하는 한국수어(KSL, Korean Sign Language)는 한국어와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깊이 알고 싶은 분은 원성옥. "수화의 언어학적 특징", 새국어생활 23권 2호, (2013)을 참고하세요. 하단에 링크 첨부합니다.)

수어나 한국수어라고 하면 아래의 수지한국어와 혼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정확한 의미에서의 한국수어는 지난 글에서 보신 것과 같이 "한국의 농문화 속에서 시각·동작체계를 바탕으로 생겨난 고유한 형식의 언어"입니다. 현장에서는 농식수어, 농식수화, 자연수화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국어가 접사와 조사의 역할이 중요한 교착어라면, 한국수어는 단어의 문장 내 위치가 중요한 고립어에 가깝습니다(엄미숙. “한국수화의 통사론적 분석”, 석사학위논문 (대구대학교, 1996)). 하지만 지시와 시선, 휴지 등의 비수지기호로 어순이 보정되며 전환이 용인되므로 어순의 제약이 극복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국립국어원 2021-01-15 한국수어문법).



수지한국어

이에 대립하는 것으로, 한국어에 기반한 수어 표현을 수지한국어(手指韓國語: SK, Signed Korean)라고 합니다. 수지한국어는 청식수어, 청식수화, 한국어 대응 수화, 문법수화, 문장식 수화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수지한국어는 '수어 단어로 표현된 한국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어로 먼저 문장을 생각하고 나서 그 문장 자체를 수어로 표현하려고 하면 대부분은 한국수어가 아니라 수지한국어로 표현됩니다.


비유하자면 콩글리쉬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농인이 수지한국어로 통역을 받거나 대화를 할 때는 대충 맥락상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점점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워집니다. 집중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말이 길어지면 집중 자체가 어려워지니까요.





실제 수어 사용에서 한국수어와 수지한국어와의 차이점이 가장 크게 체감되는 것은 비수지기호(非手指記號, Non-Manual Signal : 손동작으로 실현되는 것 이외의 기호들. 표정, 눈코입·머리나 어깨 등의 움직임 등)의 활용과 문장 호흡의 길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수지한국어의 용례를 하나 보고 갑시다.

소위 "-ㅂ니다"의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왼팔을 ㄴ자로 구부려 손바닥을 위으로 가게 하여 내밀고 오른손을 왼손 위에 올렸다가 오른쪽으로 보내는 동작입니다. 포크송 등을 부를 때 옆사람과 손바닥을 짝짝쿵하는 모양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표현은 한국수어에서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수지한국어에서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동사+합니다'의 형식이나 '명사+입니다'로 주로 사용됩니다.


한국수어에는 존댓말이 없습니다비수지기호를 통해 존대의 표현을 담습니다.

예전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수어통역사들까지도요. 한국어로는 존댓말이 오가는데, 수어에는 존댓말이 없으니 어색해서였을까요? 언제부턴가 "-ㅂ니다"라는 표현이 만들어지고 통역 현장에서 종종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문장 구조와 문장 성분의 표현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이 표현을 넣으면 필연적으로 표현이 어색해지게 되고, 수지한국어라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한국어에 수어 단어를 1:1로 대응시켜 수어 문장을 만드는 것도 수지한국어의 활용에 해당합니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1:1로 변환할 수 없습니다. 겹치는 단어와 표현도 있지만, 단어의 위치가 달라지거나 표현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까지 모두 변환하고자 하면 어색한 문장이 됩니다. 어색할 뿐만 아니라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지한국어는 문장 자체가 길고 휴지(休止, pause)가 제대로 삽입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길어질수록 상대방이 알아듣기 어려워집니다.

청인인 수어통역사가 의식적으로 한국수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청인은 음성언어가 제1언어이므로 수어 표현이 한국어에 종속되는 수지한국어로 표현되게 됩니다. (수어로는 이 상황을 '목줄 잡혀 끌려간다'라고 표현합니다.)




관련된 일화 두 가지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1.

문화공연 안내 통역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보통 공연장의 안내 멘트는 친절하고 긴 편입니다. 정확한 멘트는 기억나지 않아 검색을 통해 유사한 표현을 찾았습니다.


곧 공연이 시작되오니, 즐겁고 유익한 공연관람을 위해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지고 계신 휴대전화는 전원이 꺼져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주시고, 자리 이동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동영상 및 사진촬영과 녹음이 금지되오니, 이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공연 시작 전 관객 여러분께서는 본인의 좌석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출구 및 비상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라며, 비상상황 발생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전한 곳으로 신속히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문장들을 수지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편의상 글에서는 수어 단어를 한국어로 표기합니다.)



곧 공연이 시작되오니,

빨리+춤(음악)+시작+되다

즐겁고 유익한 공연관람을 위해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즐겁다+이득+공연+구경+위하다+잠깐+안내+말+(상대에게)주다

가지고 계신 휴대전화는 전원이 꺼져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주시고,

가지다+핸드폰+배터리+끄다+다시+확인+(내게)주다

자리 이동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자리+일어나다+움직이다+하지마+(내게)주다+원하다



벌써 아득해지네요.. 이 아래는 생략합니다....


한국수어로 표현하면 위 문장을 좀 더 간단히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표현만이 정답은 아닙니다.)


곧 공연이 시작되오니, 즐겁고 유익한 공연관람을 위해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춤+발표+시작 (휴지) 전+잠깐+설명+필요

가지고 계신 휴대전화는 전원이 꺼져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여 주시고,자리 이동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핸드폰+쥐다+(화면 길게 터치하는 동작)+끄다+꼭+확인+부탁

사람+앉은 자리 바꾸다, 배회하다, 떠나다+안되다+부탁


영상으로 보여드리는 게 가장 좋겠지만 장비가 없어서 영상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안내방송 통역을 몇 번 하고 나서, 현장 감독님 중 한 분이 물어보시더라구요. 

한국말이 긴데 수어통역은 짧아서 신기하다, 예전에 수어를 배웠었는데 배웠던 거랑 지금 통역하는거랑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어떻게 하는거냐? 하고.



#2.

이건 저희 어머니께서 겪었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 시청 장애인복지과 담당 공무원과 인사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어머니는 농인이라서 수어통역사와 함께 갔었습니다. 인사를 했는데, 담당 공무원이 통역사보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수어로는 짧게 이야기했는데 한국어로는 길게 이야기했으니 말을 지어내서 거짓말 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지요.




위 두 일화 모두 한국어와 한국수어가 완전히 똑같을 거라는 생각에 기반한 오해입니다. 통역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수어의 발화 시간과 한국어의 발화 시간이 다르면 통역사가 통역을 잘 못하거나 거짓으로 통역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합니다. 이는 한국어와 한국수어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고, 수어가 한국어의 보조적 의사수단 정도일 것이라는 오해에 기반합니다. 

통역을 하다 보면 당연히 발화에 소요되는 시간은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서로 다른 언어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가끔 일하다보면 말을 하면서 동시에 수어를 해달라는 요청도 종종 받습니다(이걸 심컴Sim-com, Simultaneous Communic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또한 위와 같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요청은 저는 대개 거절합니다. 간단한 발화라면 할 수 있지만, 공식적인 자리이거나 중요한 통역에서는 수어나 한국어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음성언어와 수어를 함께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제가 말을 하고 수어통역을 요청하거나, 제가 수어를 하고 음성통역을 요청합니다. 다른 통역사가 없는 상황이라면 수어로 먼저 이야기하고 말을 하거나, 말을 먼저 한 뒤 수어로 다시 이야기하겠다고 양해를 구합니다.

짧고 단순한 내용은 말과 수어를 어느 정도 같이 할 수 있지만, 정서적인 내용이나 복잡하고 중요한 내용은 음성언어와 수어를 함께 쓰다 보면 죽도 밥도 안되게 됩니다. 말도 어눌해지고 수어도 많이 빼먹게 되죠. 수어나 한국어나 어느 한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데 쏠린 쪽도 제대로 발화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외국어 통역을 할 때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해달라고 요청하지는 않잖아요? 


시각언어와 음성언어가 물리적으로 함께 발화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수어에서 마우딩(mouthing)과 마우스 제스처(mouth gesture)가 비수지기호의 일환이니만큼, 수어를 하면서 음성언어를 함께 쓴다면 비수지기호의 한 축을 놓고 가는거라 애초에 수어를 불완전하게 구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한국수어'를 배우고 잘 구사할 수 있을까... 그건 다음 글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참고자료

원성옥. "수화의 언어학적 특징", 새국어생활 23권 2호, (2013)

http://kiss.kstudy.com/public/public2-article.asp?key=50284867

허일. "한국어와 한국수어의 동사 특성에 따른 수화의 다양성"

안영회. "한국 수화언어의 특징과 수화 성경 번역의 실제", 성경원문연구, (25), (2009)

이현화, 원성옥, 허일, 홍성은. "한국수어의 마우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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