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③_자기 사랑 브리지!
나의 기분 날씨는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가 치는 날인데도, 거울 앞에서는 마치 맑은 날씨에 사진 한 장이라도 찍듯이 무조건 ‘김치! 치즈!’의 표정으로 방긋방긋 억지로 웃어야만 하는 ‘긍정의 거울 놀이’보다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여러 유형의 애정템 취향들을 저렇게 몇 개의 예시만 들어봤을 뿐이지만 이미 절반은 감이 잡히지 않는가? 왜 그런지 그 이유들 말이다. 무엇보다도 ‘취향의 애정템’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방법은 ‘거울 놀이’와는 다르게 나 자신에게 매우 솔직해질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커다란 차이점일 것이다. 나의 마음 상태가 어떻든 간에 거울 놀이처럼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그 무드(mood)에 어울리는 것들로 내가 원하는 유형의 애정템을 고르기만 하면 되니깐 말이다.
마치 베스킨라빈스의 31가지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는 재미처럼! 어이쿠야. 31개나 있으면 완전 마음 부자 아닌가. 31개는커녕 힘들 때는 단 3개만 있어도 정말 기운 날 텐데. 아니 한 두 개만 있어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내가 행복할 때 함께 하고 싶은 애정템 하나, 그리고 내가 힘들거나 불행할 때 함께 하고 싶은 애정템 하나만 있어도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 은근 든든한 지원군이자 버팀목이 되어 주거든.
그만큼 나의 심신 상태에 따라 그에 딱 맞는 애정템을 골라서 나를 위한 맞춤식 선물로 제공할 수 있게 되니깐, 이거야말로 나만을 위한 ‘맞춤식’ 사랑법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런데 투명하게 정직한 거울 앞에서는 나의 겉모습이 있는 그대로 보일 뿐이다.
취향의 애정템처럼 나의 마음 날씨에 따라서 원하는 색상의 모습을 고를 수도 없다. 단 하나의 외형적인 겉모습만 드러나니깐 말이다. 하지만 진짜 속마음의 내면까지는 거울에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얼굴 표정으로는 어느 정도 드러날 수가 있겠지만 ‘긍정의 거울 놀이’처럼 그 순간에만 애써 좋게 꾸며댄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거울이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그런 연기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매우 힘든 상태라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먼저 알아채지 않는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나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내면의 진짜 내 모습은 굉장히 힘들어서 지쳐있거나 고통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물론 힘들어하는 내 모습조차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자신만 있다면, 나를 위로하거나 성찰하고 싶을 때는 좋은 방법이다. 억지로 가짜 연기를 할 필요만 없다면야, 뭐가 그리 나쁘겠는가. 오히려 더 좋지.
그렇게 거울 앞에서 아무리 솔직할 자신이 있을지라도 문제는, 거울에 보이는 액면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치면서 받아줘야 하는 사랑법이 다소 힘겨울 때도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불행과 고통의 강도가 높을수록 더 그럴 수가 있다. 반드시 하얗게 투명한 거울 앞에서만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방법이라면, 나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이든 간에 순전히 오로지 나 스스로 혼자서만 그 모든 상황을 다 감당해야 하니깐 말이다. 근데 이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이지. 동전의 양면 같다고나 해야 하나.
행복한 순간에는 그 행복을 오로지 나 혼자서 흠뻑 만끽하면 되니깐 별로 나쁠 건 없지만, 그만큼 반대로 불행한 순간에는 그 불행 또한 오로지 나 혼자서 모두 다 감당해야만 한다는 의미거든. 그나마 행복의 순간에는 그 행복을 내가 100% 다 흡수하고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거지만, 문제는 불행의 순간에도 그 불행을 내가 100% 다 흡수하면서 모든 고통을 나 혼자서 다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어찌 보면 꽤나 괴로운 방법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가 불행한 것도 마음대로 티도 못 내고 반대로 막 행복한 척까지 해야 한다고? 와우. 그거는 뭐,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 사람한테 마음 편히 쓰러질 자유조차도 없으니깐 억지로 꼿꼿하게 일어서서 행복한 척 버텨야 한다는 고통까지 두 배로 짊어지라고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방법이 또 불행할 때만 안 좋은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행복할 때는 나 혼자서 모두 다 그런 좋은 감정을 충분히 흡수하니깐 좋을 것만 같지만, 결국에는 아무리 행복해 봐야 기껏 100%의 행복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의미와 다름없거든. 그게 무슨 말이겠는가? 행복의 최대치 한계가 설정되어 있다는 의미다.

너무나 적나라한 거울 앞에서 그저 나 혼자만의 속삭임이니깐 그럴 수밖에 더 있나. 나랑 같이 행복을 공유할 만한 애정템 같은 다른 수단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 혼자만의 시공간인 거울 앞에서는 힘들 때 나를 위로해 줄 만한 어떤 힐링 수단의 애정템도 없어서 그 슬픔을 반으로 줄일 수가 없는 만큼, 행복할 때조차도 마찬가지로 그 행복을 함께 배로 불릴 수 있는 애정템이 없어서 아무리 기뻐 봐야 나 혼자만의 행복 한도 100%를 초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행복이나 기쁨 같은 좋은 긍정의 감정들일지라도 200%처럼 더 많이 만끽할 수가 없는 도구가 바로 매우 정직한 거울인 거지.
즉, ‘행복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속담은 솔직 담백한 거울 앞에서는 그다지 적용되기 힘든 말처럼 보이는 것 같다.
이런 거울 놀이는 선택 사항이 없는 만큼 상황별 맞춤식 사랑법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원하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주체적인 자유 의지 자체가 거의 없는 것과 다름없다. 그만큼 행복이냐 불행이냐의 감정 종류 혹은 그런 감정의 농도에 따라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들이 거의 없다는 의미다. 어떤 감정이든 간에 더욱 흠뻑 빠져들어서 심취하고 싶을지라도, 플러스(+) 마이너스(-)의 증감 효과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딱 보이는 만큼만 그대로 느껴야 한다는 거지. 굳이 연기까지 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엄청나게 탄력적인 증감의 변화와 기대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긍정의 감정을 배로 느끼고 싶을 때는 조금 아쉬운 방법일 수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가감 없는 거울이 부정적인 어두운 감정 상태에서도 어떨 때는 나름 나쁘지 않은 ‘자기 사랑법’이 되어 줄 때가 있기는 하다. 나 자신을 듬뿍 사랑해 주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몸이 너무 지쳐있거나 마음이 손상된 상태일 때는 차라리 이런 거울 앞에서 차분히 자신을 가다듬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너무 열정적인 ‘자기 사랑’보다는 오히려 그전의 워밍업(warming-up)처럼 심신 회복을 위해서라도 고요한 ‘자기 돌봄’이 더 필요할 수도 있는 단계일지도 모르거든.
표현만 다를 뿐 둘 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들이다. 다만 긍정의 감정 상태인 나를 좀 더 기쁘게 해 줄 것인지 혹은 부정의 감정 상태인 나를 좀 더 보듬어 주면서 돌봐줄 것인지의 차이일 뿐이지. 현재 감정 상태에 따라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신경 써주는 마음은 똑같다. 그런데 불행한 상태에서는 막 새로운 것을 무언가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와 의욕 자체가 생기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럴 때는 오히려 거울 앞에서 나의 민낯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위로해주거나 토닥여주는 사랑법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애써 연기할 필요 없이 진솔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진짜 거울의 실체뿐만 아니라 내면의 마음속 거울도 같이 필요하겠지.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거울.’

하지만 어떤 감정이든 간에 나 자신과 함께 부대끼면서 실컷 사랑하거나 맘껏 슬퍼할 수 있도록 생동감 있게 자유로운 수준의 ‘자기 사랑’을 더 원한다면 당연히 거울보다는 애정템이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다.
기쁨의 순간에 그 좋은 긍정의 감정을 아주 충만하게 더욱 만끽하고 싶다면 나 혼자보다는 무언가와 함께 할 때 더 많은 행복의 에너지가 솟아날 테니 말이다. 친구나 가족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도 있지만 앞서 살펴봤던 여러 유형의 애정템들과 함께 할 때도 그런 긍정의 에너지가 몇 배는 더 커지는 시너지(synergy)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이런 나의 행복 바이러스가 더 많이 방출될 수 있게 해주는 ‘기쁨의 애정템’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면 되거든. 내가 너무 좋아하는 카페에서 가장 좋은 음료 한 잔을 시켜서 흘러나오는 음악 분위기에 흠뻑 취해볼 수도 있을 테고, 무작정 기차를 타고 창밖의 바닷바람을 쐬면서 나의 행복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도 있겠지. 혹은 좋아하는 향의 캔들을 새로 하나 사서 집으로 가져갈 수도 있겠지. 그저 행복의 애정템을 발굴하거나 하나 골라서 실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밝은 감정을 실컷 사랑해 주기 위해서 애정템과 함께 한 것처럼 이와는 반대로 나의 어두운 감정 또한 맘껏 분출하면서 흘려보내주고 싶을 때도 애정템과 함께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다크한(dark) 심정일 때는 기쁨의 애정템과는 좀 다른 분위기의 힐링이나 평온한 느낌의 애정템을 골라야지만 더 좋은 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자신의 상황과 감정에 따라서 그 순간에 어떤 애정템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본인의 취향에 달려 있을 것이다. 비슷한 심정일지라도 그때그때 끌리는 애정템은 매번 다를 수가 있거든. 그래서 손수 선택하여 고른 애정템들이라고 해도 항상 똑같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유사한 감정이 발생할지라도 동일한 시공간이 아닌 이상 자신의 마음 상태는 항상 똑같을 수가 없을 테니깐 말이지.
가령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매우 유사한 상황에서 똑같이 발생할지라도 그 순간 나한테 어떻게 느껴지냐에 따른 디테일한 차이로 인해서, 어떤 날에는 거울 앞의 독백 위로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지만 또 다른 날에는 가장 최고의 특별한 애정템을 골라야지만 그나마 좀 간신히 해결이 가능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어떤 날은 유독 부정적인 감정의 강도가 높게 느껴져서 너무 극심하게 슬프거나 마음이 격하게 아프다면 나의 진짜 감정과 민낯의 얼굴을 거울 앞에서 똑바로 직시할 만한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거울 속의 나 자신과 무리해서 대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애정템과 함께 하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이다. 특히 거울처럼 자신을 정면으로 응시할 필요가 없다면 더욱 괜찮을 것이다. 조용한 산책이나 북스테이(book stay)처럼 그저 가만히 평화로운 시공간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나의 내면에도 집중할 수 있는 ‘자기 돌봄’ 형태의 애정템일수록 더욱 안성맞춤일 테니깐.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by 생텍쥐페리)
마침 딱 이런 상황에 너무 잘 어울리는 명언처럼 보이지 않는가. 특히 둘만의 열정 넘치는 핑크빛 사랑의 발열 온도가 엄청나게 뜨거운 상태보다는, 뭔가 서로 간의 물리적 거리 혹은 심리적 거리로 인해 느껴지는 애틋함이나 그리움의 회색빛 사랑이 뿜어내는 열병의 발열 온도가 뜨거울 때 더욱 어울려 보이는 느낌이다. 혹은 그런 열정이나 열병의 폭풍우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에 찾아오는 안정과 평온의 사랑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때도 어울릴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적인 소설인 ‘어린 왕자’ 작품과 함께 이런 명언을 남긴 ‘생텍쥐페리’의 직업이 비행사였다고 한다. 직업상 자신의 연인이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만큼 서로 간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배경 덕분에 이런 명언이 탄생한 건 아닐까. 그런데 저런 느낌의 감정은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의 사랑에서도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앞의 상황처럼 ‘자기 돌봄형’ 애정템과 함께 할 때면 이런 느낌이 물씬 더 올라올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이든 나 자신과의 사랑이든 간에, 서로가 너무 좋아서 무조건 마주 보면서 행복의 에너지만 뿜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항상 그런 핑크빛 사랑의 열정으로만 가득할 수 있는 삶이라면 굳이 마주 보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럴 수 있는 환경과 마음만 받쳐준다면 당연히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면 더 좋겠지. 애완용 강아지도 온종일 끼고 살 수만 있다면 그러는 경우들이 많을 텐데 애정하는 대상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마주 보지 않으면서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다만 아무리 애정이 넘치는 찐사랑의 연인일지라도 환경적 현실상 혹은 서로 간의 개인적 사정상 좋은 핑크빛으로만 언제나 꼭 붙어서 온종일 서로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아무리 사랑하는 나 자신일지라도 무조건 핑크빛의 마음으로만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 또한 항상 매 순간마다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모든 상황이 항상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간 본연의 특성상 가지각색의 여러 감정에서 언제나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존재인지라, 겉으로는 아무리 좋은 것을 다 갖춘 사람이라고 해도 내면까지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는 점이 훨씬 더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하니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은 오죽 더 하겠는가. 언제 어디서 또 무슨 일들이 생길지도 모르는 우연적인 행운과 불운의 가능성을 늘 함께 달고 다닐 뿐만 아니라, 그런 다양한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그 현실을 처리할 만한 전지전능한 신적인 능력과 최고로 좋은 환경을 탑재하고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니깐 우리처럼 평범한 소시민들일수록 별로 좋지 못한 사건이나 현실을 마주치게 된다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저 ‘자기 돌봄형’ 애정템들과 함께 하면서 나의 마음을 돌봐주고 자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럴 때면 더욱 실감 나게 느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저런 생택쥐페리의 사랑 명언이었다. 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그 방향을 말없이 묵묵하게 함께 바라봐주는 나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꽤나 든든한 자기 사랑과 위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 자신의 어떤 감정이라도 모두 다 받아주고 싶을 정도로 나를 향한 사랑이 충만해서 바다같이 넓고 깊은 마음일지라도 그렇게 받아주려는 주체인 ‘내면의 나’ 자신과는 다르게, 막상 현실 속의 ‘진짜 실체인 나’ 자신은 힘들어하는 본인의 그런 모습을 그 누구한테도 쉽게 드러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많이 손상되었거나 나약해져 있을 때도 있는 법이다. 설령 그런 자신을 온 마음을 다 하여 정성껏 품어주고 싶어 하는 상대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기 자신’일지라도, 엉망진창인 내면을 내보이는 것이 당장은 썩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별로인 모습을 바로 오픈할 수가 없을 만큼 모든 의지와 의욕이 바닥나서 마음이 많이 침체되어 있을수록 더 그럴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그럴 수가 있을 테니깐 말이지. 어쩌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약한 모습을 더욱더 허용해 주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평소에 강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한번 무너지면 완전한 회복이 쉽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더 많이 다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습과 겉으로 드러나는 요인들로만 사람을 함부로 쉽게 판단하고 자신들만의 잣대로 오인하여 멋대로 취급하는 것만큼 위험한 게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겉으로는 아무리 강해 보일지라도 너무 힘들어하는 자신의 내면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그럴 때는 반드시 정면으로만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려고 너무 보채듯이 몰아붙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다. 물론 자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는 정말 좋은 거지만 모든 대화라는 것이 우선 감정적으로 극한 상태는 벗어나야지만 가능하지 않던가.
만약 상대가 매우 친한 절친이라고 해도 내 눈앞에서 펑펑 울고 있거나 혹은 방금 넘어진 바람에 무릎이 까져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는데, 아무리 속상하다고 할지라도 갑자기 어떤 못된 놈이 그랬냐고 다짜고짜 화부터 내면서 그놈부터 잡겠다고 수사반장처럼 추적 60분이라도 찍듯이 당장 대화부터 시도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슬퍼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그 친구를 먼저 진정시키는 것부터가 더 중요한 것일까. 이런 상황만 봐도 우리는 금방 알 수가 있다. 그 친구의 아픔과 고통이 좀 완화될 수 있도록 마음부터 먼저 진정시키는 게 더 급선무라는 사실 말이다. 아무리 가정만 해보는 설정극이라고 해도 이렇게 타인의 상황에서는 상대를 위한 마음도 잘 알아채고 그만큼 잘 배려도 하는 사람들일수록 가만 보면 자기 자신한테는 잘 못하는 경우들이 보일 때가 꽤 있다. 다른 타인들이 사람인만큼 자기 자신도 똑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들한테 오히려 더 무심하거나 야박할 때가 많은 걸까. 과연 먹고사는 게 너무 힘들고 바빠서 그런 걸까. 자신한테는 습관적으로 별로 그런 시도를 해보지 않아서 어색한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나의 상태는 별로 고려할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었기에, 어떤 상태인지 알아채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은 걸까.
어떤 이유든 간에 아무리 자신과의 대화일지라도, 나 스스로가 대화가 가능할 정도의 상태가 아니라면 저렇게 ‘자기 돌봄형’ 애정템들과 함께 하면서 그저 같은 방향을 고요하게 함께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을 때가 많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도 잘 모르겠을 정도로 너무 혼란스럽거나 혹은 마음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혼미할 정도로 넋이 나간 상태라면 어떻게 나랑 대화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게 꼭 마음 상태뿐이겠는가. 너무 과도한 일정으로 빡빡한 일상에 시달리느라 몸이 너무 지쳐버려서 마음까지 정지된 듯한 시기에는 무조건 나를 평온하게 쉬도록 해주고 싶을 뿐이지 어떤 대화를 시도할 의지조차도 생기지 않을 수가 있다. 그게 아무리 나 자신과의 대화일지라도 말이지. 이럴 때는 나만의 애정템과 함께 그저 같은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정말 좋은 최고의 자기 사랑법이 아닐까 싶다.
# 숲 속 산책의 시공간에서 산들바람 공기들과 내가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잖아.
# 북스테이 공간에서 나를 위로하는 책의 문장들이 나의 마음 방향을 같이 바라보고 있잖아.
# 눈앞의 바닷가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이 내가 바라보는 그곳을 같이 바라봐주고 있잖아.
이러한 평온하고 따스한 나의 힐링용 애정템은 모두 다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서로가 너무 좋아서 핑크빛 마음으로 마주 보면서 사랑의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같은 시공간에서 애정템 그대와 나랑 함께 존재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서로가 너무 좋아서 행복하기만 할 때는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사하는 것도 좋지만, 뭔가 조금 사는 게 벅차고 힘든 순간에는 서로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어깨에 살짝궁 기대고 있는 듯한 이런 편안한 분위기도 너무 좋은 것 같다. 나의 애정템들이 그렇게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람처럼 은근 든든하게 위안이 되어 주는 그 느낌이 참 포근하다고 해야 하나. 마치 이런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너무 힘들면 나에게 기대도 된단다. 잠시 쉬었다 가렴.’ 서로가 전혀 말하고 있지 않아도 저런 속삭임으로 둘러싸인 듯한 푹신한 느낌으로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면서 평화로이 공존하고 있는 듯한 그런 무언의 시공간이 참말로 너무 좋다.

이렇게 자신만의 애정템은 여러 가지로 활용하기 나름이다. 눈부시게 맑고 화사한 거울보다도 오히려 더 강렬하게 뜨거운 한여름 같은 ‘자기 사랑법’이 되어 줄 수도 있고, 너무나 투명하게 청렴결백한 거울보다도 오히려 더 은은하게 온화한 봄햇살 같은 ‘자기 돌봄법’이 되어 줄 수도 있는 애정템들이거든. 마치 변화무쌍한 카멜레온을 닮은 여러 사랑의 모습들처럼 보이는 것 같네. 진솔한 거울과의 담백한 속삭임은 기본 뼈대를 우려낸 사골국물 같은 느낌이라면, 왠지 애정템과의 막역한 부대낌은 말캉말캉한 마시멜로우를 색상별로 녹여 먹는 느낌 같구먼. 과연 어떤 게 더 좋겠는감.
정답은 없다만 그 순간의 나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나. 내가 너무 몸이 춥고 마음이 시리다면? 따스한 진국의 뼛국물을 우려낸 듯한 사골국물 한 사발보다 더 좋은 게 어디 또 있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내 마음이 그런 한겨울의 시베리아 상태까지는 아니라면? 그런데 거의 반복적인 일상으로 많이 지쳐있어서 무미건조한 사막의 마음 날씨라면?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말캉한 마시멜로우가 그런 나의 메마른 마음을 촉촉이 녹여주는 사막의 봄비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그러면 또 그거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싶네.
즉 정답은 ‘그때그때 달라요.’가 맞을 것이다. 다만 우직한 기본 뼈대 같은 우리의 심플한 ‘거울이’보다는 우리의 러블리한 ‘애정템’의 살집이 좀 더 풍성해서 옵션이 더 많다는 것뿐이겠지. 그만큼 그저 살집을 더 키우느냐 빼느냐의 문제겠지. 우리의 저 유명한 속담 문구의 선택 범위를 넓혀주듯이 말이야. “행복은 나누면 두 배뿐만이 아니라 몇 십배 몇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슬픔은 나누면 절반뿐만이 아니라 반의 반의 반으로도 될 수도 있다!”는 현상을 보란 듯이 보여주는 애정템들은 마치 행복과 슬픔의 용수철처럼 우리의 마음 상태를 자유자재로 요리해 주는 요술사처럼 보이거든!

이렇게 우리의 소중한 애정템들은 참 다양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밝게 빛나는 긍정의 감정들을 증폭시켜 주는 확성기 역할의 스피커 기능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어둡게 그늘진 부정의 감정들은 완화시켜 주는 완충제 역할의 스펀지 기능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멀티 버튼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나의 다양한 감정들과 ‘자기 사랑’의 마음을 연결해 주는 완벽한 ‘브리지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애정템들인 것 같다. 자신을 매우 사랑하는 마음을 ‘애정템’이라는 중간 매개체에 담아서 그 사랑의 주인공인 ‘나(ME)’에게 정성껏 전달하는 일종의 메신저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깐 말이다. 이런 애정템을 활용한 ‘자기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열렬히 연모하고 사랑하는 ‘나 자신’에게 부치지 못한 가슴속 깊은 곳의 편지가 되어버릴 뻔한 것 아니겠는가. 결국 애정템을 향한 사랑 실천은 나 자신을 향한 사랑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자기 사랑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