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한 번 몸에 밴 것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평생을 짊어지고 사는 것 같다. 추억도 사랑도 그렇지 않나. 한 번 강렬히 머릿속에 자리한 장면은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다.
우리 아빠는 회사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시면 꼭 함께 놀아주셨다. 노는 방법도 다양했다. 수건을 가지고 와서 머리가 띵할 만큼 꽉 묶은 다음 방 안을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며 수건 돌리기를 했고, 작은 탱탱볼을 꺼내서 거실을 축구장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울리는 초인종에 부모님은 계속 사과를 드려야 했지만 말이다. 한 번 주의를 받고서도 놀이는 끝나지 않았다. 조신하게 앉아서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나 팔씨름 같은 것을 했다. 가끔은 아빠의 발에 올라타 비행기를 타기도 했고, 목에 올라타 목마를 타기도 했다. 그래서 오후 7시 30분은 나에게는 상징적인 시각이다. 아빠는 항상 7시 30분에 집에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 날은 특별할 것 없는 날이었다. 아빠를 위한 환영식을 준비했다. 주황색 수건을 갖고 와 현관문 앞에 반듯하게 펼쳐 깐 뒤 레드카펫이라고 명명했다. 자칭 레드카펫 주위에는 인형과 조명을 세웠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불을 껐다. 7시 10분부터 일찌감치 쇼파 뒤에 숨어있었다. 이리저리 속닥이며 7시 30분을 기다렸다.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지은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환영식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셀럽이었다. 그 명성과 자부심이 아빠가 퇴근 이후의 시간을 쉬지 않고 놀아줄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았으려나.
지금은 환영식 따위는 없다. 귀찮음과 쓸데없음이라는 타당한 이유가 붙었다. 이제 아빠는 초대받지 않은 결혼식에 가는 사람처럼 조용히 들어오신다. 가벼운 눈 맞춤과 인사말이 스친 뒤에는 당연하다는 듯 다시 적막이 흐른다. 보드게임은 발코니 구석에 자리했고 인형은 버려진지 오래다. 탱탱볼 따위는 흔적도 없다.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잃게 되는 것이 많다. 더이상 19층 아주머니는 20층으로 올라오지 않는다. 19층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레드카펫으로 사용되던 주홍빛 수건은 찬장 안쪽에서 오래오래 자고 있다. 더이상 우리 아빠는 셀럽이 아니다. 팔씨름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목마도 없다.
적응하기 힘든 세상이다. 적응하기 힘든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 역시 순식간에 바뀌어가는 것들과 마주할 때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 변화들에 정확히 발맞추기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가끔은 나 혼자 정체된 것은 아닌지, 모두가 앞을 향해 달릴 때 바보처럼 우뚝 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이 몰려온다. 이십 년 가까이 같은 집에 살다 보니 매일 밤 같은 천장 아래서 같은 이불을 덮고 누울 때면 그런 불안이 더 강조되는 듯하다. 예측하기 어려운 우리의 미래가, 모순적으로 너무나 예측이 갈 것만 같은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미묘한 불안을 선사한다.
이런 불안이 찾아올 때면, 문득 나의 옛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빠의 목 위에 올라타 천장을 만지던 그 시절. 참 따스했고 포근했던 시간. 그리움은 대개 과거의 행복한 것을 떠올리기에 어느 순간 그리운 감정이 들었다는 것은 현재의 삶이 내가 생각한 것만큼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움은 그만큼 부족한 행복을 과거에서 찾아 메꿔보려는 노력인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사그라진 옛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것이 지니던 행복의 부재로 인해 아쉬움과 공허함의 감정이 찾아왔을 때, 그 감정에 맞서기 벅찬 우리가 애써 회피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바보 같은 방법 중 하나다. 그리워하는 것은 탐스러운 열매를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발목을 줄에 단단히 묶어 나무에 고정시켜 놓는 것과 같다. 아직 갈길이 먼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언제 다시 열매를 맺을지 모를 나무와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새 열매를 찾으러 떠나야 한다. 없어진 것에 눈을 두며 꾸물대기에는 짧은 인생이다. 전설은 과거에 있어 전설이다. 현재로 불러올수록 마모한다.
어른이 되는 것은 색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가끔은 낯선 색으로, 어쩌면 괴상한 색으로 말이다. 우리는 빠르게 변하는 색에 적응해야만 했고 그러니 여러 번 불안했으며, 색이 내 맘같지 않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옛 색을 그리워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내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동심이나 청춘같은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내게 보색과 같은 사람들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나의 색이 어떻게 바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혹시 슬픔에 가득 잠긴 색으로 바뀌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떤 색으로 바뀐들 나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시간이 흐르면 삶의 책장은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혹시 글자 몇 개가 책장의 무게를 넘기지 못하고 종이와 종이 사이에 끼여버렸다면 그대로 놔두면 된다. 소중한 것이라 가져가고 싶다고? 그렇게 잊히고 말까 두렵다고? 그럴 필요 없다. 끼인 글자는 얇은 종이에 스미고 스미다가 결말이 완성되는 순간 반듯하게 새겨질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위대한 명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사의 그라데이션으로 오래오래 숨 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