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실에서 우리 가족 문제에 대해선 꽤 논리 정연하게 잘 설명하던 내가,
말문이 탁 막힐 때가 있다.
“그때 어떤 감정이었나요?”
라는 질문 앞에서.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화가 난 것도 같고, 슬픈 것도 같고, 서운했던 것도 같다.
이런 감정을 가질만한 상황인 것은 알겠는데
내가 정말 그런 감정이 들었나?
감정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없을 무. 그 자체의 상태.
당황스러웠다.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머릿속은 정말 문자 그대로 ‘백지’였다.
마치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를 내밀며
“여기서 무슨 그림이 보이나요?”
하고 누군가 묻는 것 같았다.
다만, 나도 모르게 눈물만 뚝뚝 흘렀다.
"모르겠어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고, 나는 계속 울기만 했다.
단절을 하고 나서야
내 감정에 무감각했던 이유를 알았다.
어릴 때부터 솔직하게
감정을 말하면 안 되는 구조 안에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내가 택한 생존 방식이었다.
심리학에서는 나처럼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상태를
감정 표현 결핍(alexithymia) 혹은
정서 억압(emotional suppression)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상태’를 뜻한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나는 지금 화가 났다.”라고 느끼기보다는
“이 사람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어떻게 중재해야 할까?”
같은 분석적 사고가 먼저 떠오른다.
감정을 말하면 공격받거나,
그로 인해 마음이 무너졌던 경험들이 누적된 결과다.
그 기억이 몸에 새겨져,
감정을 느끼는 회로 자체가
‘꺼지는’ 방식으로 고착화한 것이다.
나의 경우, 원가족 내에서 뿐만 아니라
결혼 이후 꾸린 가족 안에서,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이상하리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나도 의아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포용력이 넓은 성격인가 보다'라고 스스로를 이해했다.
그게 내가 화가 나지 않는 나를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아주 무례한 행동을 한 사람을 만나도
나는 그 사람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내가 더 잘 행동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흘렀다.
나의 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알아주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탓했고,
내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조차 서툴렀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가족 구성원들의 감정 상태를
빠르게 읽고 예측해야 했던 아이였다.
그 감정이 폭발하기 전에 미리 예측하고 조율하여 예방해야 했다.
그래야 내가 내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다.
내 감정보다 그들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하지만 조율의 과정은 늘 벽에 부딪혔다.
타인의 문제에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결핍된
나르시시스트 가족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내 생각이나 감정을 쉽게 '비난’했다.
'넌 왜 이렇게 예민해? 네가 그러니까 아빠가 더 저러잖아.
그리고 넌 왜 이렇게 따지려고만 해? 부정적인 생각 좀 그만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해봐.
가족은 모든 걸 포용해줘야 하는 거야. 너는 왜 이렇게 포용하지 않으려고 하니?'
그때마다 나는 ‘표현하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하고
우울의 수면 아래로 더 깊이 나를 묻었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법보다
눌러 참는 법을 먼저 체화했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각하지 못할 뿐이었다.
자각되지 않은 감정은 무의식에 머물며
돌출되어 ‘바늘처럼’ 튀어나왔다.
분노의 감정은 자각할 수 없었지만
무의식의 주머니 안에 분명히 욱여넣어져 있었고
감정은 내 내면에서 얌전히 없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았다.
주로 꿈으로, 병리적 신체 현상으로 나타났다.
지독한 악몽으로 밤새 식은땀을 흘리거나
엉엉 울다가 깨거나
자다가 숨 가쁘게 호흡이 가빠져 놀라 깨기도 하고
자면서도 끙끙 앓기를 잘했다.
낯선 장소에 가거나 친밀도가 낮은 사람들과
오래 함께 있으면 여지없이 몸이 아팠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에게 수련회나 수학여행은 아주 고역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두통을 동반한 구토 증상은 자주 있었다.
첫 직장생활은 매우 고됐는데 그때는 구토를 거의 매일같이 해서
뇌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염려되어
뇌 CT 검사까지 받은 적도 있다.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었고 의사는 스트레스성 위장 장애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갑자기 안면이 굳고
내가 공중에 붕 뜨고 입을 열어 말을 뱉기가 어렵고
모든 풍경이 작아지는 현상들이 자주 있었다.
그렇게 내 안에 나는 나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는데도
나는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해서 힘들게 살까?’라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곤 했다.
(추후에 내면에 존재하는 비난의 목소리의 실체에 관해 심리학적 관점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나는 결국 상담사의 제안에 따라 원가족과의 단절을 받아들였다.
그땐 정말, 일상이 유지되지 않아
불가피한 선택이라 여겼다.
회복되면 다시
문제 해결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단절 이후,
거리를 두고 원가족과 나 자신을 돌아봤다.
도서, 연구 논문, 전문가의 영상 강의 등을 찾았다.
내 상황과 마음을 잘 설명해 주는 내용을 만날 때면
놀라웠고 반가웠고 고마웠다.
상실의 슬픔 속에 헤매면서도
문제를 객관화하여 이해하기 시작했고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나의 이러한 문제를 잘 설명해 준 고마운 책을 소개하고 싶다. 『몸은 기억한다』(베셀 반 데어 코르크)는
트라우마 심리학 분야의 고전으로 꼽히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환자들은 트라우마 자체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고 트라우마를 겪은 후 오랜 세월 지속된 두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신체의 직관적인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는 뇌 영역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법을 습득한 것이다. 이 영역의 활성은 두려움을 동반할 수도 있고 두려움을 더 또렷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모든 감정과 감각을 인식하는 곳이 바로 이 영역이며, 자기 인식과 자신이 누구인지 느끼는 감각의 토대가 된다. 우리가 목격한 것은 비극적인 적응의 결과였다. 끔찍한 감각을 차단하기 위해 삶을 온전하게 느끼며 사는 기능마저 없애 버린 것이다. ” 172-172 쪽.
원가족 내의 여러 폭력적 상황, 감정 무시, 인격적 비난 등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자기 인식의 역할을 하는 뇌 영역을 정지시켰다. 그러니 내가 어떤 걸 느꼈는지 알 수가 없었고 다만 병적인 증상들에 힘겨워하며 삶을 지속해 왔다. 자기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감정 억압을 해왔던 것이다.
나는 내 감정을 자각하는 힘을
조금씩 기르고 있다.
결혼 이후 꾸린 내 가족 안에서는
좀 더 건강한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과거에는 남편이나 아이들과 갈등이 생겼을 때조차
‘화’라는 감정 자체가 자각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마치 감정을 느끼는 주체인 내가 "OFF"상태였다가 "ON"이 된 것 같다.
내가 화가 날만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이제는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의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예전에는 잘 자각하지도 못했지만, 어쩌다가 화가 나도 잘 참고 지나갔던 나였다.
변화 초기에는
화가 났던 사건이 떠오르는 데 하루가 걸렸다.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어제 나에게 한 말은 사실 정말 부당했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 화가 정당한지를 스스로 검토한 뒤
며칠이 지나서야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내 화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하거나,
최대한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을 단어를 고르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썼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나는 과거와는 달리,
즉각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한다.
아직 표현이 서툴러 어색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단순히 감정만 표현하는 것을 넘어
내가 바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니, 관계가 더 좋아졌다.
나를 대하는 가족의 모습에서
배려와 존중이 느껴진다.
이러한 변화의 시작이 원가족과의 단절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불어 나라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비난 없이 들어주는
현가족이 있어 나는 안심하고 더 표현을 잘할 수 있다.
단절 이후 나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더 주목했다.
나는 존중받지 않는다고 느낄 때 가장 화가 난다.
화라는 감정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나에게 중요한 변화이다. 나아가 나는 존중의 태도를 요청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감정을 맞추느라
정작 내 감정이 무엇인지 외면하고 살아온
누군가가 있다면
물리적, 심리적 단절이 선행되지 않고
내 감정을 자각하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나는 나와 당신이 감정과 욕구를 온전히 자각하고,
정확히 표현하는 일이 자연스럽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