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 정말 많이 울었다.
마치, 누군가가 죽은 것처럼.
실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마치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것처럼,
그렇게 울었다.
처음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이토록 서럽게 울까.
내가 대체 무엇을 잃은 걸까.
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애도란 꼭 ‘사람의 죽음’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심리학에서는, 우리가 의미 있는 무언가를 잃었을 때
그 상실 앞에서 애도의 감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나는 장례를 치르는 사람처럼 울었다.
살면서 그렇게 울어본 적은 없었다.
분명히 나는 무언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 무언가는 분명 내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긴 것들이었다.
어려운 일이 었지만, 나는 관속을 들여다 봤다.
아파도 직시하고 싶었다.
관 속에 들어간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사랑받았던 것처럼 느꼈던 유년기 기억의 조각들,
기대했던 부모의 모습,
‘정상 가족’이라는 환상,
그 안에서 나 없이 산 껍데기 같은 나.
매달리는 나, 이해와 공감과 애정을 갈구하는 나.
‘그래도 나는 이 가족 안에서 사랑받았을 거야.’
‘이만큼 버텼으니,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야.’
‘이 정도는 내가 감당해야 가족이 돌아가니까.’
내가 만든 신화들, 신기루 같은 믿음들...
단절은 나에게 심리적 거리를 확보해 주었고
나는 냉정하게 내 삶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좀 더 명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되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을은 불타고 있다.
나는 화상을 입었다.
내가 재가 되기 전에 뛰쳐나왔다.
그 마을의 반대 방향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나는 마을을 하염없이 돌아봤고
그래도 저기에 내가 받고 싶었던 이해와 사랑이 있었던 건 아닌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울며 돌아보길 반복하며
걸음을 옮겼다.
울음의 의미는 보통 슬픔, 분노, 기쁨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가족과의 단절 이후에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눈물을 흘렸던 건
애도였고 그것은 일종의 통과 의례와도 같은 것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심리적 출생(心理的 出生)'이라고 부른다.
진짜 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내 안에 있던 허상들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거짓자기’의 죽음이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소아과 의사인 위니캇은 인간의 ‘자기’를
'참자기(True Self)'와 '거짓자기(False Self)'로 구분하며,
참자 기는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자발적으로 표현하면서 형성되는 생생한 ‘진짜자기’이며,
반대로 거짓자기는 아기의 욕구가 무시되거나 억제될 때
외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형성된 방어적 자아로,
겉보기엔 적응을 잘하지만 내면은 공허하고 삶의 실감이 결여된 상태라고 설명한다.
원가족과의 단절 이후
나도 당황스러울 만큼 격한 울음의 반응은
단순히 감정이 폭발한 것이 아니다.
기존의 정체성 구조의 붕괴인 것이다.
이로부터 새로운 ‘자기’가 태어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그러니 역기능적 가족과의 단절을 결심하기 전에
자아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죽음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그 죽음 앞에 망설이고 있다면
나는 말해주고 싶다.
이별은 죽음처럼 아프겠지만,
진짜 자아는 그 죽음을 지나야 태어날 수 있다고.
나는 나와 당신이 남은 삶만큼은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