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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Apr 08. 2022

파리에 가면, 낭만도 있고 기쁨도 있고 그녀도 있네

40일간의 대학원 졸업기념 유럽여행 3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 유로스타를 탄 지 몇 시간,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런던에서 파리로 이어지는 유로스타는 도버해협을 해저터널로 연결하는 초고석 국제선 기차로, 바다를 횡단하는 문명 이기의 결정체이며...

는 무슨.

좌석은 비좁고 와이파이는 수시로 끊겨 오는 내내 고생을 했다.

사랑하고 애정하는 보다폰의 4G 유심칩이 없었더라면 꼼짝없이 숨이 막혀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파리 북역에 내린 나는, 오기 전부터 단단히 준비했던 나비고를 꺼내들었다.

나비고는 한국의 티머니 카드인데, 다시 사면 비용이 소요되니 과거 한 번 산 이후로는 잊지 않고 파리에 올 때마다 소지한다.

이번 파리 여정은 7일이 될 예정이라, 7 day 자유이용권 버튼을 누르며 충전을 하고는 지하철에 올랐다.


그렇게 숙소에 행복하게 잘 도착했습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게요?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충전한 나비고를 태깅해도 개찰구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뭐지? 이럴리가 없는데? 결국 충전이 잘못되었다는 판단 하에 인포메이션을 찾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 나비고 카드 충전 안됐어요? 라고. 물론 영어로.

그랬더니 못 들은 척을 한다. 분명 전의 사람이 영어로 물을 때는 대답하는 걸 봤는데...

그래 여긴 프랑스니 다짜고짜 인사도 없이 영어로 물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누가 나한테 곤니찌와 하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어?


구글을 켰다. 이 나비고 먹통인데 어떻게 해요?

그제야 역무원이 내 얼굴을 본다. 나보고 한번 태깅을 했는데,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아 10분간 재사용이 금지되었다고 알려줬다.

물론 영어로.

언니 왜 그랬어요. 영어 그렇게 싫어요?

우여곡절 끝에 숙소가 있는 역으로 도착하기를 삼십 분, 또 다른 위기를 맞이했다.

분명 나가는 출구를 sortie라고 표시하는 건 확실한데, 출구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떡하지?

불분명한 선택의 기로에 서서, 나는 '관상'이라는 비과학에 지금을 맡겨보기로 했다. 지나가는 수 많은 사람들 중 관상이 가장 좋아보이는 젊은 여성에게 정중히 길을 물은 것이다.


나는 알게 되었다. 관상은 과학이다. 관상이 비과학에 불과하다면, 내가 고른 이 언니가 내게 출구를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출구까지 데려다주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파리다.

파리구나. 지하철에는 오물 냄새가 가득하고, 설명할 수 없는 기름 냄새도 공기를 둥둥 떠다닌다. 그러나 역 밖으로 나오면 내 더러움을 네가 어쩔 거냐는 식으로 속절없이 낭만적인 풍경을 보여주는 애증의 도시에 왔다.

파리에 오기 전, 어떤 숙소를 고를까 굉장한 고심을 했다.

고급 호텔로 전 기간 숙박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한인민박을 갈 것인지 아니면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호텔을 예약할 것인지.

결국 마레지구 근처의 한 호스트가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개인실을 빌려 4일가량 머물기로 했다.

유기농 오렌지 주스를 내려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숙소를 찾은지 한 시간, 이 대문이 저 대문같고 저 대문이 이 대문같은 이 도시에서, 집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다.

엄마가 해준 조기교육은 영어까지가 딱이었기 때문에 까막눈이 된 나는 모든 장소가 다 어렵다.

필사의 방법을 강구한 끝에, 호스트가 보내준 와이파이를 찾았다. 와이파이 신호가 가깝다는 것은 숙소도 가깝다는 뜻이리라.

와 나 천재 아니야?

그렇게 서서히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대문 앞에 서니, 나를 맞이하러 온 호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는 '보통의' 파리 숙소를 올라가기 위해 호스트를 올려다보니 내 캐리어를 들고 4층까지 올려주는 호의를 보여줬다.

팔뚝 운동에 도움 많이 되셨을 거에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s를 만났다.

대학시절 만난 s는, 같은 과도 동향 출신도 아니지만, 가랑비 젖듯 내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사람이 된 친구다.

같은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s는, 내가 졸업여행으로 파리를 갈 예정이라 하니 바쁜 와중에도 파리로 날아와주었다.

만난 기쁨을 누릴 시간도 잠시, s는 마무리하지 못한 과제가 있다며 정신 없이 노트북을 꺼내 무언가를 적는다.

괜히 바쁜 친구에게 생떼를 부려 파리로 오게 만들었나 싶어 못내 미안했다.

그래도 s는 네가 왔으니 나도 와야지 하며, 시끌벅적한 바에 앉아 세상에서 제일 힙한 옷차림을 하곤 열심히 무언가를 적는다.

이어서 나온 이름 모을 칵테일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맛이 나고, 만두라고 시킨 음식에서는 송편 맛이 났다.

완전 이 세계에 온 한국인 범생이 A가 된 기분이었지. 얼마나 신나고 좋던지.

다음 날 다시 만난 s는 알아온 브런치 집이 있다며 몽마르트로 가자고 했다.

사실 파리를 몇 번이나 방문하면서도, 위험하다는 소리에 겁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 몽마르트다.

p는 의기양양 물랑루즈 간판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고 했는데...

s와 있으면 안 해본 것, 안 가본 곳을 가게 된다는 기분 좋은 마음에 열심히 걸어 몽마르트로 향했다.

아니 근데 다 좋다 이거에요.

맛있고 예쁜 브런치집 다 좋은데, 이 계단 올라가라는 말은 좀 그렇잖아요.

나는 s도 똑같이 올라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심술을 부렸다.

그렇게 도착한 hardware societe paris.

내부 인테리어 환상, 경치 환상, 맛 환상, 서비스 환상.

누가 힘들다 그랬어요?

아니 난 당연히 이럴줄 알았어. 당연히 좋을줄 알았지~

역시는 역시다.

나와 s는 각각 대표 메뉴라고 하는 메뉴를 하나씩 시켜 먹어보았는데, 둘 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시킨 메뉴는 오리고기였다.

그리고 몇 년 만에 만난 s는 어제 만난 것처럼 위화감이 없었지.

s는 몽마르트에 왔으니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보고 가야 한다며, 와서 사진이나 찍고 가라고 했다.

나는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안 올 수도 있을 것만 같단 생각에(정답이다. 이후로 귀찮아서 안 옴) 열심히 언덕을 올라 대성당 앞, 셔터를 눌렀다.

날씨는 좋지, 배는 부르지. 고도 차이로 사방은 탁 트여 있지.

더 바랄게 뭐가 있을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문만 무성하던 몽마르트 언덕 열쇠고리 팔이 피플들의 표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왠만한 거절과 고집스러운 외면에도 끊임없이 에펠탑 모양 열쇠고리를 딸랑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을 인내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호객행위를 하는 몽마르트의 터줏대감들이다.

이들이 싫어 몽마르트로 안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나는 그들 앞에서 세상 겁쟁이가 되어 하늘만 보며 계단을 내려갔다.

물론 s는 용감하게 웃으며 잘 거절을 했다. 그 와중에 나는 걔네가 s한테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발만 동동 구르고.

아 안사요 안사. 니네꺼 그럴수록 더 안사.

s는 몽마르트를 내려온 김에 좀 더 걷자고 한다. 날씨도 좋고, 아직 예산도 있으니 쇼핑도 하고 싶은 마음에 번화가를 찾아가는 길 요리조리 가득한 색깔에 반해 s가 내 모습을 많이도 남겨주었다.

사실 이 날 입은 옷이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싹 다 새로 사서 갈아입을 요량에 쇼핑하러 가는 길 우연히 예쁜 카페가 보여 자리를 잡았다.

내부 인테리어를 초록과 핑크로 마감한 곳이었는데, 당근 케이크가 맛있기도 했지만 내 뒤에 앉은 남성의 옷차림이 더 기억에 남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가죽 조거 팬츠에 아이보리 피셔맨 니트 그리고 주황색 비니를 입은 그 사람을 보면서, 나는 s에게 괜히 빨리 옷가게로 가고 싶다고 재촉을 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브랜드샵을 들어가고도 아무것도 사지 못한 나에게, s가 선물이라며 꽃다발을 사줬다.

p한테 자랑하라며. 그 마음은 한국에 온 지금까지도 남았다고.

결국 패딩을 샀다.

그것도 평소라면 촌스럽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브랜드에서 샀다.

사람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기대를 하고 들어가면 마음에 차는 게 없고, 마음을 비우고 들어가면 이렇게나 마음에 드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안 들어가는 옷가게란 없는 것이다.

앞으론 그냥 다 들어가야겠다.

s는 파리 도착 첫날부터 내가 쌀국수를 먹고 싶다 노래를 불렸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결국 나를 쌀국수집에 데려다줬다.

한국인은 잘 안오는 곳이었는지, 우리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는다.

음 맛도 나쁘지 않은데? 뜨끈한 국물이 오늘의 노곤함을 녹인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이한 나는 호스트의 오렌지 주스를 먹을 틈도 없이 s의 숙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침부터 s가 차려준 이것 저것을 집어먹고 나니 기분도 좋고 배도 불렀는데, 그것보다는 저것들을 사러 가기 위해 장을 보러 나설 때가 더 좋았다.

샤워도 하지 않고 자연인의 모습으로 버터 냄새 가득한 빵집을 들어갔을 때의 행복이란.

그렇게 숙소에 들어오니, 호스트가 단수 소식을 알렸다.

당장 씻고 나가야 하는데 단수가 웬말이야?

어우 짜증나. 씩씩거리며 두 시간을 기다렸다 나오는 길. 우리는 거울만 보면 지금을 남겨야 한다며 카메라에 함께인 모습을 담았다.

다시 보니 사울 레이터식 사진이 바로 이거네.

이미 우리는 예술가다. 반박 안 받습니다.

s가 찾아온 다른 식당에서, 베트남식 석쇠구이와 깔라마리 튀김, 오리고기 튀김을 먹었다.

당연히 맛있지. 말해 뭐하나. 이번 점심도 역시나, 좋았다.

저게 왜 베트남식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는 아주 사소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s가 예약해 둔 스냅사진을 찍으러 가는 길.

깜짝 선물로 s가 파리에 오기 전 미리 예약을 하고 왔다고 한다.

그 사실도 모른 채 파리에 온 나는, 고마운 마음에 더 까불며 이리저리 찍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스냅사진을 찍고, s와 수다를 떨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마침 만난 사진작가분도 몽마르트 열쇠고리 팔이 피플에게 밀침을 당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을 들으니 괜히 더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얼른 다시 파리로 돌아와 s에게 내가 예약한 스냅사진 같이 찍자고 말할 기회가 있을 줄 알았지...

fxxxxx covid.

퐁피듀 센터로 전시를 보러 가기 전, s가 가고 싶어 했던 한 옷가게를 들렀다.

왜인지 모르게 내 구글 지도에도 별표가 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유명한 곳이었나 보다.

여기서 파는 옷들도 물론 다 예쁘고 좋았지만 가게 내에서 나는 그 특유의 향기가 정말 좋았다.

나는 온갖 옷을 다 입어보고서는 역시 내가 입고 온 옷이 제일 마음에 든다며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솔직히 어제 산 패딩 때문에 못 산 게 맞다.

향수라도 사올걸 그랬나 보다.

s와 퐁피듀 센터로 향하는 길, 겨울에 뜬 해는 벌써 밤이 왔다며 세상을 어둠에게 양보하는 모습이다.

우리는 퐁피듀가 닫기 전 얼른 관람을 해야 한다며 발길을 재촉했다.

크리스티앙 볼탄스키 전 본 우리가 일류다.

퐁피듀 기본 전시 이외에 유료 전시를 보려면 추가금을 내야 한다기에 고민을 했었는데, s의 추천을 믿고 본 전시가 이렇게 많은 상념을 가져다 줄 줄이야.

각각의 전구는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고, 유대인 학살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사전적 정보 없이도 분위기만으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전시를 관람한 후, 잠시 쉬는 타이밍에 미술관 주변 이모저모를 담았다. 밖은 가로등만 환한 밤이 내렸고, 내부에는 사람들이 삼각형 모양으로 등을 대고 앉아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다.

미술관은 그 내부에 전시된 것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장소지만, 이를 담는 건물 그 자체와 그곳을 찾은 사람 모두도 하나의 작품처럼 보여준다.

기본 전시도 상당히 좋았다.

우리 집 거실에 이브클라인 그림을 걸게 된 계기도 이 날의 관람 때문이었고.

맨 마지막 파란 그림. 아직도 너무 마음에 든다.

너무나 지친 우리는 우버를 타고 한 타파스 집으로 향했다.

관광객이라고는 우리밖에 없어 보이는, 정말로 왁자지껄한 바였는데 s가 용감하게 주문도 하고 서버한테 말도 잘해줘서 그런지 너무나 기분 좋게 보낸 저녁이었다.

우리 말고도 기다리는 사람은 구름같이 많지, 서버는 적지, 음식 양은 적으니 자꾸만 주문해야 하지 정말 낭만적인 도떼기시장이었다.

나는 화이트 와인 한 잔에 거나하게 술이 올라 연신 s에게 다음에 유럽에서 또 만나면 우버만 타고 다니게 해 주겠다며 부도수표만 날렸다.

그렇게 언제 돌아왔는지 모르게 숙소에 도착한 후 기절하고 말았다.

s는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고, 내일부터는 잠시 또 혼자다.


오랜만에 온 파리, 낭만도 있고 기쁨도 있고, 그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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