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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Jan 09. 2023

'한 번 만에'라는 오만

나는 오늘을, 너는 내일을 -엄마의 아홉 번째 편지




어떤 아이가 컴퓨터게임을 하다 져서 "FAIL"이란 단어가 떴다. 옆에 있던 아버지가 FAIL의 뜻을 아냐고 물었더니 "다시 하란 뜻이잖아요!". 이렇듯 아이는 실패의 정확한 뜻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책을 보거나 강의를 들을 때 와닿는 문장이나 말이 있으면 수첩에 기록을 해놓는데, 오늘은 이도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볼까 하면서 수첩을 넘기다가 위의 글을 발견했다. 언젠가 남겨 놓은 저 문장이 오늘의 편지를 엮어가는데 안성맞춤이겠다. 한 해의 시작과 더불어 보통은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니, 이번엔 계획의 실천에 도움이 될만한 '다시 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00 하는 법! 00에 한 번에 합격! 한 번에 통과! 결코 실패 없는 선택!

온라인이나 주변에서 보는 이러저러한 경험담들과 광고들이다. 온갖 한 번 만에는 은근한 자기 자랑을 내포하고 있고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이루어낸 성취는 자기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로서 통용된다. 실패의 시간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태도가 드러나지. 실패라는 것은 곧 패배와 같아서 어떻게든 패배를 겪지 않고 성공만을 쟁취할지에 심취한 많은 이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씁쓰레한 문구들이 아닌가 싶구나.


엄마도 물론 별로 다르지 않아서 단 한 번의 도전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 했었다. 원하는 대학을 한 번에 합격하고, 시나리오 응모에 한 번에 당선되고, 미술관의 소장품 공모에서도 한 번에 되길 원했으며 항상 단기간의 성취를 꿈꿨다. 결과는 어땠을까. 전혀. 한 번 만에 이룬 것은 없어. 엄마가 열거한 예시들은 결론적으로 다 실패다. 왠 줄 아니? 한 번만 시도해서 한 번 만에 안되니 포기했기 때문이야. 지금 돌이켜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무슨 근거와 배짱으로 저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이루려고 했는지. 그리고 도대체 왜 한 번만 시도했는지. 물론 엄마도 그리 무모하지는 않아서 몇몇의 경우엔 두 번까지는 시도했다. 그래서 안 되면 그만. 두 번 이상 시도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 실패의 쓰라림을 세 번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달까.


엄마는 여러 실패 중에 한 번도 '계속 시도해 보는 게 어때?' 혹은 '네가 과정에서 성취감을 맛봤으면 실패해도 괜찮아' 혹은 '실패했더라도 너는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교과서적인? 메시지를 받은 적이 없어. 실패를 딛고 계속 다시 해야지만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지 못했고 알려 준 사람도, 위로다운 위로를 해준 단 한 사람도 없었어. 얕은 동정이나 오히려 실패한 내가 못마땅한 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뉘앙스의 침묵만이 있었지. 그래서 '실패=패배'의 공식 안에서 좌절감과 낮아진 자존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힘든 시간들을 오롯이 홀로 견뎠어. 실패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만들어야지만 내가 스스로를 그나마 인정할 수 있었어. 그래서 그 후엔 뭔가 할 때 몰래 하는 경우가 생겼다. 혹시 실패하더라도 들키지 않으려고.

실패에 대해 변명을 해야 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전혀 안전지대가 없다는 뜻 아니겠니? 성공과 실패, 이김과 짐의 경계 없이 시도 자체를 인정해 주고 또 그것들과 무관하게 나라는 인간 자체를 인정해 주는 조그마한 안전지대가 있어야 우리는 또 일어서고 단단해질 텐데. 그래야 그 고통의 시간이 나를 갉아먹기만 하는 무가치한 시간으로 허비되지 않고 곧장 다시 하는 힘으로 충전될 텐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뭐 특별히 자기 우월감이나 혹은 반대로 열등감이 강해서 한 번 만의 성공을 추종하는 것은 아닐 거야.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또한 승자독식이라 패자-승, 패의 이분법적 안에서의 패자-에게는 훨씬 가혹한 환경이다. 창조를 지양하고 모방만을 지향한 이 체계 속에서, 사회 곳곳에서 경쟁만을 부추긴 결과로 인한 자신들도 모르는 피해자들이라 오히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등수를 매겨 상위권에게는 승자라는 우월감과 그에 걸맞은 대우가 따르고 거기 끼지 못하는 다수에게는 패자라는 낙인과 그에 걸맞은 냉소만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누구나 승자가 되고 싶어 하고 그러니 여러 번의 실패 없이 뭔가를 성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자랑거리로 여겨질 거다. 그러니 실패를 숙명처럼 떠안아야 하는 창조적 활동이 무가치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고 견디기 힘이 들며 진득이 믿고 기다려주고 투자해 주는 인식과 시스템 또한 부재하다 말할 수밖에 없겠지. 실패하면 또 하면 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인식은 요원하고 한두 번의 실패가 낭비로 패배로 여겨져 사라져 버린 수많은 아이디어와 인재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생각해 보면 이게 진정 패배며 낭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승패를 가리는데 우연이나 운의 요소가 아주 많은데도 그런 운이 포함된 결과마저 개인이 뒤집어써 스스로의 열등감에 자학하는, 이럴 수밖에 없는 구조자체가 문제 이긴 해.

12년의 학업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판가름해 버리는 수능이라는 입시제도-대표적으로 우연과 운이 작용하는-에 길들여져 있고 그전에 학교 공부의 등수로 항상 경쟁해야 하고 좁은 취업문 앞에서 경쟁해야 하고. 경쟁만을 가르치고 배워온 우리에게 어쨌든지 단기간의 성취는 큰 미덕이 됐겠지. 인재를 빨리 길러내 단기간의 사회발전에는 유리해서 채택된 경쟁 시스템은 그러나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기존 가치관의 전환기에 와 있는 지금 어쩌면 마지막 발악인가, 경쟁이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경쟁자로 서로를 대하고 직장 안에서도 동료를 경쟁자로 대하고 그것이 내면화되어 어디서든 경쟁의식이 발동해 상대를 경계하기에 바쁘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어떻게 될까. 거기에서 참다운 인간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껏 이기는데 바빴고 어떡해서든지 뒤처지지 않는데 혈안이었지 뒤쳐지거나 못 이긴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데도 너무나 소홀했다. 이런 승, 패자의 이분법적 가치판단이 우선한 세계 안에서 패배의 굴욕은 정말로 이기기 힘들 거야. 오로지 혼자 감당해야 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실패와 장기간의 시행착오 끝에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은 티브이에나 나오는 특별한 사람으로서 별개로 치부되고 우리는 정작 실패의 내성을 가질 기회조차 좀처럼 얻지 못하는 것 같아. 우리의 인식 때문에 또 환경 때문에.


또한 -경쟁사회의 일면이라 할 수 있는-엘리트의식이 강한 사회일수록 단기간의 승리에 집착하며 자신을 과하게 닦달하는 경우가 많다. 실패에 따르는 비난과 자존심이 떨어져 겪는 괴로움 때문에. 그래서 한 번 만에 잘 해내는 것이 꼭 개인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임과 동시에 남에게, 또 나에게 자랑할 만한 것으로 인식하지. 아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고 실패를 못 견뎌할 가능성이 크다. 한 번의 승리를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여 우월감을 느끼고 남의 시선과 판단에 따라 내 자의식이 오락가락하는, 그래서 거듭 실패하거나 뒤쳐지는 자신이 "쪽 팔리는" 사람말이야. 사실은 자존심이 높은 사람은 자존감이 낮고, 실패에 의연한 쪽이 훨씬 자존감이 높다. 의연히 일어서 다시 하면 되지 몇 번 실패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지. 

실패를 계속하더라도 나의 가치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남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한 번뿐인 내 인생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산다는 것을 알면, 나의 내일을 위해 어제의 실패를 뒤로하고 오늘 또다시 시작할 거야. 자존감은 그렇게 높아지는 거다. 그렇게 실패의 시간은 절대로 필요한 시간이다. 한 번 만에의 오만을 버리고 튼실한 실패의 탑 위에 우뚝 서 힘차게 휘날리는 당당한 깃발이 되려면.


한 번만의 성공과 단기간의 성취가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 사회. 실패한 이웃을 대하더라도 실패한 자신을 대하더라도 그것이 패배라는 인식의 비약이 더 이상 없이, 그저 또 하면 되는 당연한 과정으로 가벼운 일상으로 여겨지는 것. 실패라는 단어가 단지 게임 한 판 진 듯, 내 생활에서 내 삶에서 그리 가벼이 느껴질 날. 이것은 나의 또 너의, 또 어떤 이의 생각의 변화가 모아지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거야.

 


엄마의 편지를 읽는 이도는 지금껏 몇 번의 인상적인 실패를 했을까. 그러고도 툴툴 털어버리고 실패인지도 모르고서 다시 한 판 게임을 시작했을까. 의연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상상된다. 엄마는 너를 격려해 주고 혹여나 있을 실패의 고통을 보듬어 줄 안전지대가 기꺼이 되어주련다.

그러자니 실패를 대하는 나의 자세부터 성찰하게 되는 지금이다. 나는 이제 여러 번 실패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나. 새로운 마음으로, 진 게임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나. 너의 실패, 아니 실수를 웃으면서 받아들이게 되었나.


...... 어째 한참 더 시행착오를 겪어야 될 듯싶구나.




JAN. 2023. 엄마의 아홉 번째 편지.




수많은 시도 끝에 어느새 퍼즐의 달인이 된 이도. 엄마가 찍고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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