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여름. 아무 날도 아닌 어느 날, 연주곡 CD를 선물 받았다. 친구가 알려준 연주곡이 너무 좋아 매일 듣는다고 했더니 갑자기 선물로 준 것이다. 아무 날도 아닌 날 받은 선물은 꽤 감동이었다. 친구는 내게 “선물은 아무 날 아닐 때 줘야 더 감동인 거야”라고 했다.
여러 번의 이사로 CD를 잃어버렸다. MP3와 휴대폰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면서 CD는 필요 없는 것이 돼 버렸다. 그 연주곡은 아무 날도 아닌 어느 날 갑자기 떠올라 종종 나를 괴롭게 하는데 들으려야 들을 수 없다. 음악가의 이름도 연주곡 제목도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생각나는 건 오직 스캣과 멜로디뿐이어서다. 음악 하던 친구가 알려준 곡이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선물 준 친구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그건 좀 곤란하다. 연락처도 없을뿐더러.
어쨌든 내가 아는 건 연주곡의 멜로디와 스캣. 이 곡을 찾고 싶어 스캣 소리를 검색해 보기도 하고 음악을 전공한 친구들에게 흥얼거려 보기도 했는데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인터넷에 없는 게 없다지만 둠둠둠 둠둠둠둠둠 둠둠둠둠 둠둠둠둠이라는 검색어만으로 나올 리가. 살다가 갑자기 그 곡이 떠오르면 찾지 못할 걸 알면서도 또 둠둠둠을 검색한다. 둠둠둠은 오래 나를 괴롭힐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둠둠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 날도 아닌 어느 날 받은 선물’이 중요하다.
보슬보슬 봄비 내리는 화요일, 인사동에서 친구를 만났다. 둠둠둠 CD를 건넨 친구는 아니고 시간도 돈도 ‘0’을 하나 붙여야 할 만큼 먼 곳에 있는 친구다. 언젠가 꼭 만나길 서로가 바랐지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이야. 얼굴 볼 수 있냐는 메시지를 읽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좋아하는 친구 한 명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그렇게 우리 셋은 선물 같은 하루를 보냈다.
낮 한 시에 만나 저녁 아홉 시까지 함께 있었다. 무용가 최승희의 집터에서 한정식을 먹고 우산 셋이 나란히 안국동을 걸었다. 석 잔의 카페라테, 세 개의 칼국수를 먹는 동안 적막도 어색함도 없던 시간. 무엇보다 숨 가쁘지 않은 이런 편안한 대화가 행복했다. 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을 좋아함에도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에너지가 쉽게 방전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공통의 관심사에 공감하고 새로운 사실에 놀라워하며 대화를 주고받으니 어두워지는 밤이 아쉽기만 했다.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은데. 이런 만남 정말 귀하구나.
최근 고수리 작가님의 동아일보 칼럼 중 <독 같은 사람 멀리하기>라는 글을 읽었다. 나를 아는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떠오르는 사람이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나도 떠오르는 누군가일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다짐하게 된다. 에너지 뱀파이어는 되지 말아야지. 에너지 뱀파이어. 다른 사람들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빨아먹고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사람. 그런 사람, 그런 만남이 있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내 마음에 떠돌아다니며 상처로 남는 말들. 나 또한 가볍게 내뱉는 말로 누군가의 마음을 무겁게 하진 않았을까. 그런 고민이 깊던 시기에 찾아온 하루, 사랑하는 두 친구. 백석 시인을 얘기하며 설레하고 둥글둥글 주고받던 세상 무해한 대화들. 시간이 아깝다 느낀 만남이 참 오랜만이었다.
둠둠둠에서 에너지 뱀파이어까지 너무 와버리긴 했는데 중요한 건 그날의 만남이 너무 귀하고 소중했다는 것이다. 아무 날도 아닌 어느 날 받은 선물 같은 만남. 시간이 지날수록 에너지가 충만해지던 만남.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하며 내내 아쉽기만 했던 만남. 다음엔 정말 날 잡고 밤을 새워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