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이 캔 스피크> 관람 한담閑談
말을 한다는 것, 아니 그 말을 누군가가 들어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말이 말로써 이해된다는 건 어떤 걸까.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고 돌아 나오는 길에 문득 궁금해졌다. 제목이자 주요 대사인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는 단지 주인공인 나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걸까?
주인공인 나옥분(나문희 역)은 동네 유명 인사다. 구청에는 민원왕이며, 이웃 주민들에게는 예민, 까탈 대마왕인 불편한 존재다.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잔소리'하는, 피하고만 싶은 인물인 옥분에게 붙여진 별명은 도깨비 할매.
별명에 걸맞게 도깨비 할매를 대하는 구청과 지역 이웃들의 태도는 싸늘하기만 하고, 옥분의 말을 들으려 하는 사람은 거의(어쩌면 전혀) 없다. 오랜 시간 내내 옥분의 수없는 '말들'은 그저 '말'이 아닌 상태로 존재했다.
차갑기만 했던 이웃들의 태도가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욕을 하고, 흉을 보던 과거는 어찌 그리들 쉽게 잊는지 온갖 선물을 보내기 시작한다. 오해하고, 귓등으로 튕겨 내버리던 옥분의 말에도 귀를 기울인다. 옥분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하 '위안부')라는 사실이 드러난 직후부터 말이다.
주변 인물들의 이러한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사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잘 이해된다.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의도한 감정에 나 역시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표정을 스크린을 통해 마주하니, 그 장면과 배우들의 얼굴이 이유 없이 새삼스러웠다. 나는 문득 뭔가가 서러워졌고, 한동안 머릿속에 찜찜한 기분을 담고 다녀야 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되물었다. 바뀐 상황이라고는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뿐인데, 왜 사람들은 옥분의 말을 듣게 된 것일까? 옥분의 말에, 들어주어야야 한다는 일종의 자격을 부여한 것이 '위안부' 피해자로서의 과거란 말인가?
그 질문의 끝에서 나는 마주했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나의 인식을. 죄책감, 책임감, 연민, 동정 등과 같은 온갖 '착한' 감정으로 포장해 옥분들을 '특별'하고, '다르게' 보려 하는 모습을 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연대감도, 책임감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일제의 만행이 범죄가 아니라는 뜻 또한 결코 아니다. 나는 내게 동시대인으로서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안부'가 전쟁 범죄임을 일본이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사과하도록, 그리고 다시는 이런 반인권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기억하면서 말이다.
다만 나는 <아이 캔 스피크>라는 영화를 빌려 묻고 싶다. '위안부' 피해자를 대하고,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와 시각에 대해. 만약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었다면 옥분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는 것인가? '위안부' 피해 경험이 없는 할머니가 하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아이 캔 스피크'라는 문장에서 생략된 목적어는 '위안부' 피해 경험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말이다.
영화의 말미. 옥분은 미 의회에서 자신의 흉터를 드러내며 증언한다. 그 이후 동네 사람들의 태도는 앞서 언급한 그대로다. 동네 양아치마저 바닥에 떨어지는 중인 담배 꽁초를 발재간을 발휘해가면서까지 받아내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말이다. 담배를 향한 양아치의 간절한 발놀림은 분명 코믹했지만, 나는 그 행동이 못내 섭섭했다. 주인공 옥분이 '위안부' 피해자가 아니었더라면, 담배 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지 말라는 말은 그 의미를 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써 존재하지 못했던 옥분의 말들. 그 말들이 '위안부' 피해를 드러내기 이전에도 말의 가치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위안부'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만큼, 우리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해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면 너무 이상적인 걸까?
쓸데 없이 길게 썼지만 옥분의 말을 왜 다들 진작 들어주지 않았는지, 왜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태도는 특별한 것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때문에 나는 이 글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끝내려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을 준비가 되었나?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캔 유 리슨?'(CAN YOU LISTEN?)으로 다시 읽힐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