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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경 Nov 17. 2019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할 때

인간의 숙명적인 루틴

-자력을 기르는 아이 


아이가 벌써 일곱 살이다. 요즘은 “너 몇 살이니?”라고 물으면 덧붙여 말한다. “여덟 살 준비하는 일곱 살이에요.” 어디서 배웠는지 여덟 살 되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다 키웠다, 싶지만 아직까지는 걸을 때 엄마 손을 먼저 잡아주는 기특한 아들. 


오늘 아침에 입고 나간 바지는 9부인 듯 댕강하다. 복숭아뼈가 ‘까꿍’ 하며 수줍게 붉은 얼굴을 보인다. 몰라보게 크는 속도를 보며 언제 클까, 생각했던 때가 떠오른다. 


애가 뭘 알겠어, 싶어도 잠자리에서 “낮에 화내서 미안해”라고 엄마 마음 쓰다듬을 줄 아는 걸 보면 성큼 성큼 자라는 아이가 기특하면서도 서운하다. 언제 혼자 설까, 넘어지지 않고 온전히 스스로 걸을 수 있을까, 조급했던 초보 엄마의 마음은 이제, 언제면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더 큰 부모숙제로 전환 중이다. 

-인생 첫 과제, 직립(直立) 


사람은 매일 일어나는 일을 루틴처럼 해야 한다. 병상에 누워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하루에 한번 이상 일어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직립해야 한다는 것은 인생의 과업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태어나면서 인간의 첫 과제는,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 인생 두 번 째 과제, 자립(紫笠) 


생물학적 직립이 완성된 후에는 사회적으로 자립해야 하는 때와 마주한다. 이 자립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괴롭히고 불안에 휩싸이게 만든다.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 때도 많다. 



부모 그늘에서 벗어나 가정을 꾸릴 때, 회사에서 부당하게 잘렸을 때, 잘 나가던 경력직을 출산과 육아라는 이름으로 놓아야 할 때 우리는 ‘불안한 질문’에 사로잡힌다. ‘다시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사회적 직립이 종종, 때때로, 자주, 여전히 어렵다.  


-얼떨결에 받은 ‘작가’라는 직함이 주는 불안  


2002년 가을, 프리랜서 방송 작가라는 타이틀을 받았을 때 ‘불안’이라는 그림자도 함께 받았다. 무엇보다 작가로서 제대로 서기 위해 치열하게 매달렸다. 인정받는 작가, 가 되기 위해 선배들에게 매달리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방송을 모니터 하고, 그 속에서 좌절감도 많이 맛보았다. 또한 작가라는 타이틀은 ‘프리랜서’라는 경제적 불안으로 늘 마음을 조여오고 불안과 초조에 떨게 했다. 


- 사표 쓸 자격도 없는 일용직


내일 당장 프로그램이 사라지면 남들이 쓴다는 ‘사표’조차 쓸 자격 없이 함께 사라지는 직업, 프리랜서라는 말이 거창할 뿐 일용직이나 다름없었다. 6개월 단위로 찾아오던 ‘개편’이라는 칼날은 언제 목 끝에 닿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6개월 단위로 인정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살아남아야 하고, 작가로서 더욱 견고해져야 했고, 졸업 했지만 갚아야할 학자금은 졸업하지 못했고, 잘리게 되면 내 인생도 거기서 잘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잊을 만하면 엄습해 왔다. 



세상이 자신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스스로도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그리고 매순간 고민했다. 나는 왜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 것인가, 며칠 전 무심코 꺼내 든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다시 발견한 문장. 사회 안에서 인정을 받고 존중 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구나, 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조금 덜 흔들리지 않을까. 잘, 서 있지 않을까. 


- 불안으로부터 온전히 자립할 수 있는 힘 


6개월 단위로 온전히 ‘작가’ 라는 이름 앞에서 불안 없이 서 있는 날을 고대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7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을 안고 있다. 심리적인 초조, ‘불안’이라는 바람이 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 오롯이, 혼자 서 있게 한 당신의 문장


책을 통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혹은 가까운 누군가를 통해 듣고 체감한 그 문장들이 모여 17년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서 있도록 만들었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안의 바람 안에서 조금 덜 흔들리기 위해서, 뿌리째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그때마다 나는 문장을 찾아 서둘러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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