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은달 Feb 02. 2023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17세기 영국의 귀족들은 희귀한 것을 모으고 그것들을 관람하는 것을 즐겼다. 이국의 동물, 난쟁이, 기형아, 유희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들에겐 장난감이었다. 귀족들의 향락은 만족을 몰랐고 심지어 콤프라치코스라는 인신매매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납치하여 일부러 장애인으로 만든 뒤, 아이들을 귀족들에게 팔았다. 귀족들은 해괴한 모양의 아이들을 가지고 놀다가 지겨워지면 버렸다.      



  빅토르 위고는 이런 타락한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웃는 남자’라는 소설을 썼다. 주인공 그윈플렌은 어린 시절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어 웃는 모양의 찢어진 입을 갖게 된다. 기괴한 입을 가진 그윈플렌의 인생은 마디마 절규와 비명으로 가득했지만 웃는 모양으로 찢어진 입은 슬퍼할 줄을 모른다. 모든 희망을 잃고 죽음을 선택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윈플렌은 웃고 있다.



  이 소설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웃는 남자’에서 현대인들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의 비극이 현대로 이어진다. 감정의 자유를 박탈당한 자의 절망, 누군가의 기쁨을 위해 항상 웃고 있어야 하는 좌절은 나지 않았다.     






  나는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공공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나도 처음엔 참 친절한 공무원이었다. 기계처럼 전화를 받지도 않았고, 나긋한 말투로 수십수백 번 같은 설명을 해도 힘이 들지 않았다. 어르신들을 보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잘 다루지 못하는 엄마 생각이 더 깍듯하려고 애썼다. 4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 나는 서비스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무적이고 매서운 공무원이 되어버렸다. 자기 합리화지만 나의 호의가 누군가의 권리가 되는 순간들이 퇴적되어 왔기에, 웃으면 가벼워 보였고 공손하면 만만해 보였던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그렇게 나는 안 웃는 공무원이 되어 버렸다.



서비스직을 위한 항변을 하자면,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직업인도 결국 사람이기에 자판기에서 음료 뽑듯 친절하기가 참 힘들다. 수많은 대기업 콜센터의 직원들이 고객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아우성치지만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상담원은 없듯이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국민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내가 아는 그 감정이 맞다면 말이다.



  공무원이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민원인들에게 공분을 살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만인을 사랑하기 위해 직업을 택했다면 목사나 스님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정도로 도량이 넓지 않다. 그렇게 위대한 인간이 못된다. 그러니 공무원과 민원인, 우리 사이는 서로 존중했으면 좋겠다. 너무 냉정하지 않은 범위에서 선을 지켰으면 좋겠다.



나는 소설 <웃는 남자>처럼 입을 찢어서 웃고 싶지 않다. 내 직업의 소명을 가지고 친절을 베풀고, 진심에서 우러나와 미소 짓고, 그런 온기가 내 안에 서서히 퍼져 웃을 일이 없어도 웃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무원의 출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