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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은달 Feb 04. 2023

#3. 슬픔에 유통 기한이 있다면(2)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갓 태어난 새끼처럼 먹고 자고 쌌다. 캐나다에서는 마음껏 누워 있을 수 있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그게 다였고 생각해 보면 굳이 지구 반바퀴를 돌지 않아도, 한국에서도 그렇게 살 수 있었다.


  너른 대지와 희박한 인구밀도, 단풍으로 물들여진 거리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나는 유토피아를 꿈 꾸며 캐나다로 도망 왔다. 유튜브에서 보던 풍경이 일상이 되면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다양한 표정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삶의 여유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익살스러운 농담도 캐나다였지만 알게 모르게 벌어지는 인종 차별과 번화가마다 즐비한 노숙자들도 캐나다였다.



  내가 캐나다에 대한 선입견으로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면 나 역시 그들에게 동물원 원숭이였다. 그들은 대한민국 여자들이 모두 성형수술을 하고 파티걸처럼 꾸밀 수 있는 줄 알았다. 음주와 가무에 능하고 흥이 넘칠 거라 생각했다. 그들이 기대한 건 이른바 한국인의 매운맛이었다. 잘 놀고 열심히 일하고 화끈하고 파이팅 넘치는 코리안 걸. 그러나 나는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젖은 빨래처럼 늘어져 있고 싶을 뿐이었다.




  어디에도 천국은 없다. 내 몇 달 치 월급을 캐나다 국고에 갖다 바치고 나서야 알게 된 진리다.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인종 어떤 성별 어떤 피부색으로 살든 삶은 삶이지 천국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잘났든 못났든, 잘하든 못하든 그런 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국에서 불행한 사람은 캐나다에서도 불행하고, 한국에서 우울했던 나는 다른 이유로 캐나다에서 우울했다. (캐나다 겨울의 일조량이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문제는 슬픔 그 자체이지 슬픔의 이유가 아니다.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 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쳐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 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러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고.

신경숙, <깊은 슬픔>  중




  슬픔의 유통기한 같은 것은 없다. 슬픔의 수명은 용기와 성실성이 결정한다. 애써 비참한 민낯을 대면할 용기와 정성껏 아파할 수 있는 성실함이 그것이다. 쉽게 말해 제대로 슬퍼할 줄 아는 인간은 우울의 바다에허우적거리지 않는다. 내가 아직까지 미련스럽게 울고 있는 까닭은  대충 아파하고 무심히 웃어넘겼기 때문이다.



  애써 밝게 살려는 노력이 오히려 온몸을 무겁게 누른다. 울어도 된다. 절규도 괜찮다. 한 번쯤은 슬픔의 강에 머리끝까지 잠길 필요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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