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동백, 벚꽃, 목련, 서향, 삼지닥나무꽃
매화가 보고 싶어서 또 순천으로 향했다. 천 년이 되었다는 전설을 지닌 나무의 꽃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순천에 도착해서 선암사로 가는 길은 벚꽃으로 가득했다. 주암댐 둘레 1킬로미터는 벚꽃길이었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4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지는 이곳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임에 틀림없다. 손이 많이 가는 행사를 준비하려면 각별한 정성이 필요할 것이다.
뭔가에 끌려서 다시 찾은 선암사 심검당으로 들어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심검당은 템플스테이를 하는 건물인데 중국무협영화에 나올 법한 객주처럼 생긴 이층 집이다. 백사십 년 된 건물의 분위기가 묘하다. 절에 이런 건물이 있는 것이 의외다. 이 건물의 유래를 등명스님께 한 번 여쭤보아야겠다.
심검당에 들어서자 강한 향기가 정신을 흔들었다. 중정에 꽃나무들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맡아보니 천리향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큰 천리향 무더기는 처음 보았다. 이 꽃은 또 얼마나 된 것일까. 그곳에서 일하시는 강보살님한테 어쩌면 이렇게 향이 좋냐고 선녀가 된 기분이라고 했더니 옆에 계시던 스님이 웃으신다. 천리향은 별칭이고 '서향'이 이 꽃의 이름이다. 파라핀 질감을 연상시키는 연보랏빛 네 개의 꽃잎 여러 개가 둥글게 모여서 공모양을 만들었다. 생긴 모양이나 그 향기가 참 희귀한 꽃이다.
짐을 방에 들여다 놓고는 카메라를 챙겨서 곧바로 무우전(근심이 없는 곳이라는 전각)으로 갔다. 방장스님이 거처하시는 무우전 담에 고매화가 있다. 아. 며칠 전 내린 비에 꽃잎이 다 떨어졌다더니 하늘 가까이에 몇 송이만이 남아 있었다. 빨간 꽃받침이 꽃으로 보였지만 그건 투명한 빛을 띤 하늘거리는 매화가 떨어진 흔적일 뿐이었다. 구슬모양 꽃봉오리로 한참을 버티다가 이 주 정도 잠깐 피는 것이다. 그 사이에 비라도 내리면 사라져 버리고 마는 덧없는 꽃이 매화다. 삼월 내내 절에 꽃소식을 묻는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니 그 귀함을 맛보거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매화에 홀려서 그곳에 가게 된다.
아쉽게도 매화는 기억 속에 향기만 남기고 사라졌고 이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선암사엔 겹벚꽃도 유명한가 본데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목련과 동백도 피어 있었다. 삼월의 넷 째 주에 매화, 동백, 벚꽃, 목련이 모두 한 곳에 피어 있었다. 독특한 향기로 마음을 사로잡는 서향(천리향)과 삼지닥나무꽃도 빼놓을 수 없다. 일 년 내내 꽃이 피어있는 곳이라더니 참말이었다. 사실은 이곳에 계신 분들이 모두 향기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들과 일하시는 보살님들이 잠깐 다녀가는 사람들한테 정성으로 대하신다. 내가 매 달 내려가는 이유도 어쩌면 매화는 핑계이고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건지도 모른다. 선암사는 꽃이 아름다운 절이고 사람들은 더 아름다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