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남준
<모든 것은 술 한잔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술 한잔 때문이었다. 영원은 술을 못 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 소주 한 모금을 마셨다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뒤로는 그녀에게 술을 권하는 이도 없었다. 영원은 카페인에도 취약해서 점심 이후에는 오로지 디카페인 음료만 마셨다.
단정한 머리에 하얀 피부 작은 목소리 때문에 영원의 별명은 요정이었다. 인기도 꽤 많았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좋아한다고 대놓고 말하진 않았다. 남학생들이 하나 씩 군대를 가고 나서 가장 많은 전화와 편지를 받은 것도 영원이었다.
영원은 나름 알아주는 수도권의 법대생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 탓에 과외를 여러 개 하느라 바빴지만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남들처럼 대학의 낭만을 즐길 여유는 많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자신 앞에 주어진 삶의 과제를 차분히 받아들이는 재능이 있었다.
어느 날 영원에게도 거짓말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한 학번 위의 선배였다. 남준 역시 영원처럼 모난 데 없고 착실했다. 그들 둘은 조용히 그리고 평범하게 연애했다. 졸업을 앞둔 영원은 상견례를 했다. 그때 영원은 임신 3개월이었다.
졸업 후 남준은 대기업에 취직했고 영원은 아이를 착실히 길렀다. 가끔 동네 학원 강사 자리나 과외 공고가 올라오면 일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마음을 접었다. 그 무렵 집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집을 사기로 했다. 남준은 야근 수당을 모으느라 퇴근이 더 늦어졌고 영원은 혼자 아이를 재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때부터 영원은 밤에 혼자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남준이 퇴근길에 동네 슈퍼에 들러 사온 맥주 캔들이 김치 냉장고 안에 시원하게 굴러다니는 모습이 영원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차갑게 식은 맥주 캔 뚜껑을 치익 하고 따고는 투명한 유리잔에 콸콸 부어놓고 냄새를 맡는 것부터 시작했다. 남은 맥주는 모두 싱크대 개수대에 콸콸 쏟아 부어버렸다. 개수대에 술을 버리면서 영원은 평행 우주 속에 있는 또 다른 자신은 이 맥주를 시원하게 다 마셔버릴 수 있다고 상상했다.
나중에 영원은 맥주 거품을 조금 입에 대었다. 하얗고 차갑게 단 거품이 입술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조금 달큰 했으나 걱정했던 것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원이 개수대에 붓는 맥주의 양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남준은 드디어 영원과 맥주 한잔을 하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영원은 남준과 결코 술잔을 기울이지 않았다.
영원은 가끔 동네 놀이터에 앉아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원의 무해한 얼굴과 미소 때문인지 사람들은 쉽게 호감을 가졌지만, 영원은 그들에게 이름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가끔 해가 질 무렵이면 영원은 혼자 어디 먼 곳으로 떠나는 상상을 했다. 친정 부모님이 있는 구미는 절대 아니었다. 산이 있는 곳. 바다도 있는 곳.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 막연히 영원은 강원도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우거진 산맥이 겹겹이 쌓이고 비가 오면 안개가 산 위에서 구름을 만드는 곳으로.
코로나가 끝나고 영원의 딸은 유치원에 가기 시작했다. 남준은 때에 맞춰 승진을 했다. 대학 동아리 동창회도 해를 거르지 않고 열렸지만 아이를 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영원은 나가지 않았다. 남준도 굳이 참여를 권하지 않았다. 남준은 사교를 이유로 골프를 시작했고, 영원은 동네 엄마들과 육퇴 후 호프집에서 만나 술 한잔을 하는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서점에 들를 때 마다 영원은 공무원 수험서 코너를 서성였다. 그 즈음 영원의 친정 부모님이 은행에서 목돈을 빌려야 할 일이 생겼다. 신용이 없는 영원 대신 남준이 적극적으로 나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친정 부모님은 입이 마르게 남준을 칭찬했다.
동기 중 비혼이었던 연주가 결혼 소식을 전해왔다. 연주가 보낸 청첩장은 한 장으로 남준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영원이 그 이야기를 하자 남준은 같이 보라는 거겠지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영원은 남준에게 물었다.
왜 우리 결혼했지?
남준은 맥주를 삼키며 말했다.
아이도 생겼고. 잘 됐잖아.
그 날밤 영원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영원은 20대였다. 캠퍼스의 긴 진입로를 경쾌한 발걸음으로 누볐고, 법대 도서관에서 기말 준비에 열중하기도 했으며 어둑한 지하 바에서 동아리 사람들의 이야기에 슬긋 미소를 짓기도 했다. 술 한잔 입에 대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갑자기 장면은 바뀌어 영원은 구미의 친정 엄마에게 과외로 번 액수를 자랑하기도 했으며, 신림동 고시 학원 앞 버스정류장에 앉아 학원 소개 브로셔를 들뜬 마음으로 살펴 보기도 했다. 영원은 꿈에서 깬뒤 남준에게 다음번 동창회에는 나가야겠다고 말했다.
그 해 겨울 동창회가 열렸다. 장소는 강남의 고기집이었다. 영원이 들어서자 여자 동기들은 그녀를 감싸 안았고, 남자들은 박수를 쳤다. 그들은 영원의 몫으로 콜라를 시켰지만 그녀는 맥주병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영원의 동기 중 가장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 대기업 사원이었고 대부분 법조계에 종사 중이었다. 청와대나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원은 그 틈에서 자신도 이들과 한 때 무언가를 나누었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오랜만에 여자 동기들끼리만 자리를 만들어 2차로 향했다. 영원도 함께 였다. 일식 꼬치구이 집에서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사람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풍성하게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자 영원은 기분이 이상했다. 친구들의 회사 이야기, 상사 험담이 오갔다. 영원은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증류수와 탄산수를 섞은 술을 홀짝 거렸다. 술이 조용히 취하고 주변 소음이 점점 멀어지다 다시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열띠게 이어 나갔다. 누군가가 영원에게 너는?이라고 물었을 때 영원은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 했기에 그냥 웃었다.
테이블에 술잔이 쌓이고, 사람들이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남자 동기들이 합류했다. 누군가가 계속 분위기를 주도했다. 영원은 적당히 분위기만 맞춰주고 웃어주면 되어서 편하다고 생각하면서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그 때 가게 문이 열렸다. 남자 두 명이 가게로 들어섰다. 최근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는 인플루언서였다. 일제히 주변이 조용해지며 시선이 그들에게 꽂혔다. 영원도 그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들은 영원의 옆 쪽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들을 의식하는 듯 했으나 술이 들어가자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작은 카메라를 테이블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준이 그들을 바라보다 영원과 눈이 마주쳤다. 남준은 영원에게 그만 마시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영원은 보지 못했다. 영원은 앞에 놓인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번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영원은 저 혼자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소란스런 소리들이 멀어지고 옆 테이블의 유투버들 대화가 가깝게 귀에 다가왔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두 연예인 중 나이가 많은 쪽이 소주잔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넌 결혼을 꼭 하고 싶냐?”
아주 조금 더 젊은 남자는 잠시 주저하다 답했다.
“...그래도 아이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때였다. 영원은 불현듯 손을 들어 조금은 더 젊은 남자의 뺨을 쳤다. 주변 소음이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듯 사라졌다. 다음날 뉴스에는 200만 유투버 J가 술집에서 겪은 황당한 사건이 가십처럼 도배 되었다. 그 속에는 30대 주부의 만행이라는 키워드가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동창회 단톡방에는 모든 것이 술 때문이었다는 남준의 사과문이 올라왔다. 정말이지 이 모든 것은 술 한 잔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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