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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처럼 Nov 21. 2019

[Prologue] 아이를 갖고 싶었습니다만

'서툰가족' 연재를 시작합니다

노란 은행나무 길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부는 새벽, 버스에서 내려 잠시 걷기로 했다. 출근까지는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서울로 이직한지 2년이 넘었지만 사람이 없어 횅 한 도심은 생경하다. 그리고 설렌다. 그 어색하고도 매력적인 감정에 잠시라도 빠져야 직장인으로 모드 전환이 쉽다. 천천히 도로를 따라 걸으며 내일이면 사라질지 모르는 낙엽을 눈으로 담는다. 


“엄마!”


맞은편에서 들려온 우렁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딸아이가 갑자기 나타난 줄 알고 가슴이 덜컥했다. 다시 자세히 보니 다른 아이다. 우리 딸과 비슷한 키의 아이. 또래 아이들은 목소리가 모두 비슷한 건지.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 했다. 반대편에서 등장한 아이의 모습을 유심히,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살폈다. 엄마 주위를 꿀벌처럼 빙글빙글 돌며 뛰어오는 아이의 얼굴은 싱글벙글이다. 그 앳된 얼굴을 보자 우리 딸이 더 보고 싶어진다. 이른 시간에 어린 아이가 무슨 일일까. 궁금하지만 따라갈 수는 없다. 어, 그런데 가는 방향이 같다. 새벽 산책의 종착지인 카페가 있는 건물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걸어왔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회전문을 통과했다. 아이는 건물 경비아저씨께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이내 엄마에게 뽀뽀를 한다.  


“잘 갔다 와. 엄마가 일 마치면 데리러 갈게.”

“응 알았어. 엄마 잘 갔다 와!”


아이가 뛰어 들어간 문 위에는 ‘OO직장 어린이집’이라 적혀 있었다. 일주일에 두 세 번은 들락거리는 건물인데 어린이집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고개를 돌리니 건물 뒷문으로 들어온 또 다른 꼬마들이 어린이집 계단을 줄지어 올라간다. 복숭아처럼 솜털이 보송한 아이들을 보자 입 꼬리가 올라간다. 우리 딸도 지금쯤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마쳤겠지. 할머니 손에 맡긴 등원길이 못내 미안하다. 한참을 아이들 뒷모습을 바라보다 카페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의 평범한 일상을 평범하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내 인생에 아이는 없을 거라고 모두가 합심한 듯 입을 모으던 그때, 누군가의 임신과 누군가의 아이는 내게 절망의 반증이었다. 아이에 대한 질문만 받아도 목이 콱 막혀 도망쳤던 시간들, 입양이라도 권유받는 날에는 화가 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오지 않았던 날들. 어두운 침대에 누워 앞으로 남은 것은 지옥 같은 일상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고 입가에 기도가 말랐을 때 기적이 나와 남편의 손을 잡고 힘껏 당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순간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기가 막힌 시간들이 어느새 끝났다. 나는 엄마가 되었고, 마침표가 찍힌 일상 뒤로 조금 더 편안하게 세상과 마주하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올해 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획서나 캠페인 카피만 쓰던 내가 자소서 이후로 처음 내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뭐부터 써야 할지 몰라서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시간의 순서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하고 싶은 말부터, 아픈 이야기부터 드러냈다. 단, 개인적인 감정의 쓰레기통을 만들지 않기 위해 맑은 날, 밝은 마음으로만 썼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쓴 이유는 하나다. 엄마 되기를 꺼려하는 세상에 여전히 엄마가 되고 싶은 그녀와 아빠가 되고 싶은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지나가는 유모차를 남몰래 바라보며 눈물을 삼키고 독박육아가 힘들다는 친구의 넋두리가 한없이 부럽고 주변의 과도한 관심에 지쳐 깜깜한 어둠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희망의 어딘가를 붙잡고 엄마, 아빠가 된 내 모습을 그리는 바로 나와 우리들 말이다. 


동일한 경험을 하더라도 그것을 겪어내는 개인의 감정은 모두 다르겠지만, 겪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내가 경험한 이야기는 참담했지만 의미 있었고, 가슴 시렸지만 따뜻했다. 특히 딸아이로 인해 수많은 기억들이 재구성되어 감정도 수없이 뒤바뀌었다. 얻고 싶은 답안도 덕분에 많아졌다. 내가 정해 놓은 답대로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새로운 답안을 얻어 서툴지만 평범한 가족을 이루어 살아간다.  


끝이 있기는 한 것인지 갑갑한 이 길 위를 먼저 걷고, 지금 걷고, 또 걸어갈 모두에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가로막힌 정답 앞에서 울고 있는 당신에게 서툰 가족의 이야기가 늦은 밤, 작은 위로가 된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따뜻한 차 한 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부족한 글귀로 대신한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나가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것이 아이를 갖는 것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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