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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처럼 Nov 12. 2019

여전히 안녕합니다

서툰가족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자주 빛 노을이 짙은 퇴근길, 마을버스 정거장 앞 벤치에 앉았다. 종일 누군가의 아랫사람으로 지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퇴근길에는 잠시 쉬어간다.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옆자리에 접어 둔다. 검은색 무지 가방을 그 위에 올려놓자 맥없이 주저앉는다. 꼭 오늘 나 같네.    


숨이 가쁜 가을을 보내고 있다. 새벽녘 어김없이 출근을 하고 해가지면 달아나듯 집으로 돌아온다.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데 남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지친다. 모찌에게 더 잘해주고 싶고,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은데 휴일이면 비 맞은 지푸라기가 따로 없다. 무릎에 올려놓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액정 위로 우리 모찌. 귀여운 모찌가 호탕하게 웃고 있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작가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뭐야, 언제 왔어?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예상하지 못한 남편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코트가 있던 자리를 남편에게 내어 주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지. 오늘 많이 힘들었어?”

“그렇지 뭐, 괜찮아. 좀 힘이 빠져서. 앉았다가 들어가려고 했지.”

“언제 발표라 그랬지?”    


맞다. 오늘은 심사일이다. 지난 여름, 에세이 공모전에 지원했었다. 1차 심사에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그런데 두 달간의 퇴고과정을 거치면서 나도 모르게 기대가 자랐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최종 선정작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책을 출간할수 있는기회다. 아니다.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 그렇게 감정을 밀고 당기고, 글을 쓰고 고치며 가을을 보냈다. 떨어지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써 볼만큼 써봤으니 감사하자.   

  

“여보, 솔직히 말해서 나 이번에 떨어지면 너무 속상할 같아. 혹시 내가 떨어지더라도 그 날은 무조건 위로만 해줘. 예전에 대학원 떨어졌을 때처럼 장난스럽게, 떨어지는 기분은 어떻냐는 둥 농담 던지면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조금이라도 비아냥거리면 올 겨울 내내 내 눈치만 보면서 후회하게 될 거야. 알았지?”

“허허허, 알았어. 그리고 떨어지더라도 다른 기회가 또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 하지마.”    


남편에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떨린다. 낙방의 상황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좌절하는 나도,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다

   


식탁 위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김치찌개가 놓였다. 한 숟가락 뜨자 온몸의 피로가 가신다. 어린이집에서 신나게 뛰고 온 모찌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 김치찌개를 야무지게 먹는다. 토속적인 남편의 입맛을 시간이 갈수록 닮아간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가족 입맛.  

   

“엄마, 김치찌개 진짜 맛있다!”

친정엄마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들어드렸다.    

 

“맛있나? 그나저나 니가 쓴 글 말이다. 거기서 내 좀 빼주면 안되겠나? 어디 민망스러워서리. 낯부끄럽다.”

며칠 전 엄마에게 원고를 보여드렸는데, 글에 자신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 부끄러우신 모양이다.   

  

“응, 안돼. 엄마가 엄청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어떻게 빼.”

딱 잘라 거절했다.     


“장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당선되더라도 그 책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겠어요? 허허허. 또 우린 줄 아무도 몰라요.”

늘 맞는 말을 하는 남편이 이럴 때는 얄밉다.     


“모찌야, 그거 알아? 엄마 책에 말이야. 우리 모찌 아가 때 이야기가 들어있어.”

“모찌 아가 때?”

숟가락으로 흰 쌀알을 입 안 가득 넣던 모찌의 눈이 아빠를 향한다 .    

 

“응, 모찌 아가 때. 그때 모찌가 얼굴도 엄청 크고, 대머리에다가 못생겼었어. 기억나?”

그렇게 여러 번 아이 외모에 대한 발언을 할 때 장난치지 말라고 부탁 했는데, 또 시작이다. 한마디 해야겠다. 그 순간, 모찌가 웃으며 말했다.  

   

“아빠 어디 아파?”    


순간 정적, 웃음이 터졌다. 알고 그런건지 모르고 그런건지 어쩜 이렇게 아빠의 짓궂은 장난을 재치있게 받아치는 걸까. 나였다면 섭섭해서 입을 삐죽거리거나 울음이 터졌을 텐데. 사랑스럽고 유쾌한 우리 아가. 화내지 않고 웃는 법을 또 배웠다.     


이렇게 유쾌한 우리 가족이 마음 상하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내 손을 빌어서 썼지만 우리의 이야기이기에 허투루 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빼라마라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가슴 깊이 내 글을 응원하고 너그러이 허용해준 것을 알기에 더 정성을 들이고자 노력했다. 그런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다. 실패하더라도 또 언제나 그랬듯 내 편에서 응원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지만, 기쁜 일 하나 생긴다면 서로가 지고 있는 짐이 조금은 가뿐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잠들지 못하는 밤    



지난 밤, 안 자려고 발버둥치는 모찌를 재우고 소파에 누웠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영화라도 한편 보고 싶은데 몇 시간 후면 출근이다. 알람을 맞춰야 할 시간이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켰다. 시계 어플 옆으로 메일함에 눈이 간다. 새로운 메일 6개. 뭐지? 이 시간에 뭐가 이렇게 많이 왔어.  

   

공모전 담당자가 보낸 메일이다.

“최종 지원작 선정결과 발표 안내”     


심장이 마구 자비로 뛰는 걸 간신히 부여잡고 제목을 클릭했다.

.

.

.

.

.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잘못 본 게 아니겠지. 다시 메일함을 나갔다가 들어왔다. 똑같은 메일을 다시 한 번 눌렀다. 내용에 변함이 없다.    


“여보!!!! 당선이야. 나 당선이야!!!!!!”    

소파 밑에서 졸고 있던 남편이 놀라서 일어났다.

“어디어디? 어디 떴어?”   

 

메일을 확인한 남편과 부둥켜안았다. 목젖이 콱 막힌다. 어떤 시인이 울음은 목에서 나온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네. 한참을 알사탕을 먹고 켁켁 대는 아이처럼 안겨 있었다. 지난 8년간의 시간이 도화지에 펼쳐지듯 지나간다. 참 화날 일도 많았는데 감사할 일도 너무 많다. 드디어 우리의 이야기를 한권의 책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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