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계에서 너는 사라졌다]

‘내 마음의 세계에서 사라져 간, 한 사람과 나의 이야기‘

by 사막의 소금



어려서부터 나는 유독 상상력이 풍부했다. 밖에서 땀을 흘리며 뛰어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나를 가장 빠져들게 한 것은 산더미만큼 쌓아놓은 책을 어둑해질 때까지 읽는 일이었다. 특히 전래동화나 이솝우화를 좋아했다. 그 속에 묘사된 상상 너머의 세계는 늘 어린 나를 잔뜩 흥분시켰다.


엄마의 “밥 먹어라”는 잔소리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불을 켜는 순간조차 아까워서 미동도 없이 책을 읽어갔다. 그날 밤, 짙은 어둠과 고요는 내가 낮 동안 그려놓은 세계에 주인공으로 입장하는 시간이었다. 어디든 날아갈 수 있었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나는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날의 상상은 아침까지 이어졌고, 꿈속에서도 나는 날아올랐다.


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여전히 하늘을 날고, 대륙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어린 시절 꿈에만 등장하던 큰 봉고차를 이젠 직접 운전하기도 하고, 머나먼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들은 현실이 되었지만, 늘 상상 속에서 활개 치는 나는 여전했다.


다만, 어린 시절 세상이 세계이자 우주였다면, 어른이 되어서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사회가 내 세계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와의 미래, 지나간 아름다운 시간과 특별한 순간들을 곧잘 상상했다. 이런 상상은 그가 나를 슬프게 할 때도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되었다. 나를 사랑해 주던 눈빛, 손길, 온기까지도 마치 저장소에 기록되어 있는 듯, 눈을 감으면 금세 그려졌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떠올릴 수 있었기에 마음은 괜찮았다. 서로 바빠 관계가 소원해질 때도, 앞으로 있을 우리의 시간 속 좋은 일들을 상상하면 대수롭지 않았다.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하고, 그곳의 날씨와 바다, 음식, 사람들을 담은 사진들을 찾아보다 보면, 어느새 그와 함께 거리와 바닷가를 거니는 기분에 나는 들뜨곤 했다. 그렇게 나는 상상력으로 나를 곧잘 위로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상상력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피터팬의 이야기가 어른이 되면 철없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듯이, 현실에서 상상은 유익하지 않다고. 나 역시 그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처음으로 마음이 아팠다. 물론 여느 이유들과는 달랐지만ㅡ


언젠가부터 너와의 미래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애써도, 결코 억지로는 열리지 않는 조개껍질처럼 내 마음은 어떤 순간으로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 노력은 이제 거부당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부서지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사이, 너는 나도 모르게 내 세계에서 한 발 한 발 멀어졌다. 그것이 너의 뜻인지, 나의 뜻인지는 모르겠다.


오늘도 너는 하루가 어땠는지, 수많은 이야기들을 내게 쏟아놓는다. 그러다 불쑥 “너는 내 모든 걸 좋아하잖아”라고 말한다. 나는 짧게 “맞아, 그렇지”라고 응수했다. 나는 여전히 너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낀다. 하지만 너는 알까.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이제 너는 내게 과거도 미래도 줄 수 없는, 그저 그런 존재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너는 늘 내 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네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알고 싶어 했고, 그걸 조곤조곤 들려주는 나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서 너도 상상할 것이다. 이런 내 사랑에는 끝이 없다고. 그런데 어린 시절 읽었던 특별한 책들처럼, 금세 잊히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여름방학 동안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새 학기가 되면 친구들 속에서 사라지듯, 나 역시 너를, 내 마음을 읽어주지 않는 너를, 네게 맞춰주길 당연히 바라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기로 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내 사랑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그게 너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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