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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Sep 06. 2024

멜빵바지는 입지 마세요

다정한 나의 구원자



옷을 좋아합니다. 신발도 좋아해요 막상 사도 입는 것만 입고 신는 것만 신으면서도 좋아하니까 사고, 예쁜 건 자꾸 나오는 법이니 또 삽니다. 쇼핑중독은 아니었지만 구경하는 것도 사는 것도 좋아하던 사람이었어요. 필요한가 아닌가는 나중의 나에게 맡기고 일단 사고 봅니다.


살까 말까의 고민보다는 무엇을 사지? 어떤 색을 살까?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가 고민이었던 옛날 옛적의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살 게 왜 이리도 많은가요. 내건 살 시간이 없어요. 아 정신도 없고 돈도 없네요.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하하.  어쨌든 꼭 필요한 것만 사도 많아요. 게다가 아이가 사용할 건데 아무거나 살 수 있나요. 기능을 비교하고 디자인을 비교하고 가격을 비교하고 후기를 읽어보고. 아 너무 피곤합니다. 내건 아직 시작도 않았는데 산 것 같은 기분, 이미 질려버린 기분은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장바구니가 차고 넘칩니다.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마음에 들면 일단 나중에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마구 담았더니 컴퓨터 안의 장바구니는 소화불량에 걸려 더 이상은 먹을 수 없다고, 제발 그만 넣으라고 소리칩니다. 사지도 않을 걸 왜 이리 자꾸 담냐고 다 뱉어버리기 전에 멈추라고.


미안해. 


배가 터지기 직전의 장바구니에게 늦은 사과를 건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 다시 태어날 거야.







매년 계절이 바뀔 때면 작년에 도대체 뭘 입고 다녔는지 입을 옷이 없습니다. 있는데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저만 그런 거 아니지요? 


무엇을 입어야 하나...






늦봄이나 여름이면 좋습니다. 초가을도 괜찮아요.

흰색티셔츠, 블라우스, 나시, 남방도 가능합니다. 예쁜 핏의 상의라면 거의 모두 커버할 수 있거든요. 흰색이면 금상첨화지요. 그야말로 마법의 옷입니다. 멜빵 특유의 자유로움과 편안한 느낌을 갖고 있지만 너무 헐렁하지 않은 , 펴도 접어도 예쁜 적당한 길이, 너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살짝 바랜 빛의 중청색깔, 좁지도 넓지도 않은 바지통의 넓이.


Everything is perfect.


다정한 나의 구원자, 애정해 마지않는 나의 애착 멜빵바지를 소개합니다.







멜빵옷을 좋아해서 여러 벌의 멜빵바지와 멜빵치마를 보유하고 있어요. 색깔도 디자인도 모양도 각각인 멜빵옷들은 언제나 저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지만 결국엔 이 옷입니다. 어떤 신발을 신어도 거기에 맞게 어울려서 원하는 느낌에 따라 골라 신으면 되거든요.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되는 날, 뭘 입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면 똑똑 옷장문을 두드리고는 말을 걸어옵니다.

 

"내가 나설 차례인가?"

"응, 너밖에 없어."


하트 뿅뿅 눈과 편안한 마음으로 옷을 꺼냅니다. 오래전에 구입해서 정확한 가격은 기억나지 않지만 큰 거 두장을 주고 조금 거슬러 받았습니다. 큰맘 먹고 산 명품이거든요. 뽕을 빼도 열두 번은 더 뺐어요. 한국의 여러 도시들을 다녔고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캥거루와 코알라의 나라까지 다녀오신 귀한 몸입니다. 이든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부터 초등학교 4학년인 지금까지 옷장에서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필요할 때를 스스로 알고 때맞추어 나오는 다정한 나의 구원자. 절대 먼저 나서지도 뒤로 빼지도 않습니다. 오래도록 아끼고 아끼며 입은 오만 원권 2 장으로 산 나의 명품바지입니다.







“너, 옷정리 할 때마다 꺼내질까 봐 겁나거나 조마조마하지 않았어?”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3-4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믿음이 생겼어. 릴리가 나를 다른 곳으로 보내지 않을 거라는. 릴리는 날 정말 좋아하거든.”


그랬습니다. 정말 좋아했어요. 아니 지금도 좋아합니다. 제 애착 멜빵바지니까요.



애착 (愛着) - 사람이나 동물 등에 대해 특별한 정서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







고백합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예전에 코로나 백신을 맞으러 갈 때에도 덜덜 떨며 이 옷을 입고 갔었죠. 남편이 오죽하면 똑같은 옷을 하나 더 사라고 했지만.


없어서 못 사. 슬프니까 그만 이야기해 줄래?


신발만 바꿔주면, 밑단을 접던지 펴주면, 우주에도 입고 갈 수 있어요. 못 갈 곳이 없습니다. 색깔, 통과 길이, 느낌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옷이거든요.







-멜빵바지를 입을 때는 이것만 기억하세요(저는 이렇게 해요)-

편안하지만 조금은 격식 있고 세련된 느낌을 주고 싶을 때 - 블로퍼와 함께

사랑스럽게 - 앞코가 둥근 플랫슈즈 어떠세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 끈이 얇은 조리나 투박한 느낌의 샌들이 좋아요

운동화와 함께는 잘 입지 않아요.

아 그리고 청바지는 잘 빨지 않습니다. 흐흐흐


멜빵바지가 편하냐고요? 딱 하나 불편한 게 있다면 화장실 갈 때입니다. 유남생? ^^

멜빵바지, 입지 마세요. 저처럼 빠져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고마워, 다정한 나의 구원자. 내년에도 잘 부탁해.

우주에 입고 갈 그날까지 널 놓지 않을게.



*패션과 전공이 무관한 글쓴이의 아주 개인적인 생각과 이야기입니다. 그냥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패션은 기세(氣勢)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공중도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당당하게 입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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