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과 시는 다르다. 바둑에는 무의식이 없다.
바둑과 시에 대하여 종종 생각한다.
바둑과 시는 공통되는 점이 많다. 그것은 '삶'에 관한 것이어서 그럴 게다. 바둑은 세상이치를 담고 있다. 바둑은 우주의 원리 하에 네모난 판자 위에 19개의 행과 열로 그려넣고 흑돌과 백돌로 하는 놀이다. 놀이치곤 수준높고 머리를 잘 써야 하고 체력이 필요하고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나는 시를 쓸 때 체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때론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데 한계에 부딪쳐서 쓰러지곤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시는 바둑과 달라서 더 많은 것이 필요하고 더 많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바둑은 정해진 놀이판에서 정해진 흑과 백이라는 돌로 한정된 놀이에서 무수한 판을 벌리지만 시는 우주를 넘어 무한한 우주라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한 판 위에서 벌어진다. 또한, 집중력과 체력이 없어도 시는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시는 머리보다 가슴으로 가슴보다 영혼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좋은 시를 마감을 위해 쓰고자 한다면 집중력과 체력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시는 무의식의 범주가 가장 중요하다. 무의식은 무한 우주와 같다. 무의식은 인간의 영적인 영역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술에 취해서 시를 쓰면 더 잘 써지는 이유가 이를 이미 증명했다.
바둑 = 삶 = 시
바둑과 시의 가장 큰 공통점은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둑을 두는 존재나 시를 쓰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며 사람이기에 '삶'을 표현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둑과 시와 삶의 공통점도 있는데 그것은 단 한가지다. 그것은 바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라는 기본적인 판 위에서 시작해야지 내가 있어선 안된다는 것이다. '나'를 인지하는 것이 바로 욕심이다. 욕심이 발동하는 순간 바둑은 이미 지기 시작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나'가 있어선 안된다. 나가 아닌 최소 단위가 타자와 우주다. 시는 또한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 의식의 시는 타자에서, 무의식의 시는 우주에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건너 편의 더 큰 타자와 더 큰 '무한 우주'로 나아가야 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무의식이 아닌 의식의 세계가 삶을 대부분 차지할지라도 내가 아닌 '타자'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다.
우주란 무엇인가? 아니, 삶이란 무엇인가? 아니,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나'가 아닌 '타자'를 인지하는 순간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들도 있지만, 이 말은 나보다 타자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과 같다. 나에게 '자신'은 타자다. 우주가 있고 더 큰 우주가 존재하듯이 나에게도 나가 있고 더 큰 나가 있다. 따라서 '나'도 바로 '타자'라고 인지하는 것이 오히려 편할 듯 싶다.
욕심없는 나(욕심없는 삶) = 타자 = 우주
더 큰 나(나의 나) = 타자의 타자 = 우주의 우주(무한 우주)
그렇다면, 이제는 바둑과 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 부분은 매우 흥미롭다.
한마디로 무의식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은 '무의식'이 없다. 감각적으로 둘 수는 있지만 감각도 분명 의식의 영역이다. 바둑은 순수하게 의식의 영역으로 머리와 손으로 두는 놀이다. 따라서 집중력과 기억력이 매우 중요하며, 자신의 감정조절 및 욕심버리기가 중요하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도 분명 의식의 영역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로부터 바둑은 놀이였다. 학문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모두 사용한다. '시어'란 무의식을 표현할 수 유일한 언어이기도 하다.
바둑과 시를 함께 생각하며 지금 이렇게 낙서를 하는 까닭은 주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된 듯 싶다. 주관이 개입되면 자신의 감정이 개입된다. 특히 수많은 욕심이 개입된다. 번뇌가 시작된다. 그러면 바둑은 100% 지는 게임이다. 이겼다고 해도 승리가 아니다. 시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삶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이 공존한다.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시를 쓰는 주체도 바로 사람이다. 당연히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한다. 단지 삶이라는 현실이 의식에 너무 치우쳤고 의식이 남용되어 물질화가 되어서 좋지 않을 뿐이다. 사람의 삶 중에서 무의식의 영역이 실제 더 많고 더 넓다. 우리가 잠을 잘 때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단지 의식이 무의식을 인지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의 인간의 뇌도 10%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뇌가 보다 활성화된다면 무의식의 영역까지 컨트롤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이기에 무의식을 표현할 수는 있다. 언어로 소리로 그림으로 명상으로 상상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그러한 시간에 많은 투자를 한다면 우리의 뇌는 10% 이상 더 많은 사용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삶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의식의 영역조차도 제대로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올바로 잘 사용하고 있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 세계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기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시를 쓰고 (다른 게임 하지 말고 바둑을 두고) 창작 활동을 하고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간다면 모든 것이 저절로 나아질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것을 의식화 시킨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못한 것들을 창조라고 할 수는 없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놓았던 바둑을 뒀다. 너무나 삶이 재미가 없어서 바둑을 두었는데... 갑자기 바둑과 시를 생각하게 되어서 두서없이 이렇게나마 블로그에 기록하여 저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