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공감이 가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의 성 불평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그런데 그 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책으로 읽고, 영화를 보면 대개 실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흥미롭게 읽은 책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나의 경우는 그렇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의문 나는 장면이 꽤 많았다. 공감이 가지 않고, 왜 저렇게 묘사했을까 싶은 장면들...
가까운 사람들과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해봐도 풀리지 않는 얘기들을 해보려고 한다.
1. 똑소리 나는 김지영의 언니(김은영)를 영화에서는 왜 이쁘지 않게 설정했을까?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의 모습은 왜 대개 짧은 머리 , 화장 안 한 얼굴, 그리고 안경일까?
2. 김지영이 빙의로 인해 그녀의 외할머니가 되어 그녀의 엄마에게 하는 말(OO아, 미안하다. 니가 공장에서 일하다 손 다쳤을 때 안아주지도 못하고... 이하 생략...)을 듣고, 김지영의 엄마는 그녀의 외할머니를 진심으로 이해했을까? 과연 그 한마디 사과에 어린 시절 본인을 차별했던 부모님에 대한 서운함이 다 사라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만 반지 끼워주는 손가락 따로 있고, 지장(도장) 찍은 손가락 따로 있다고 한다. 서글픈 현실이다.
3. 김지영의 엄마는사위(김지영의 남편)가 왔을 때 왜 큰딸(김은영)에게 사위에게 음식을 갖다 주라고 했을까? 그리고 그때 김은영은 엄마에게 왜 나에게 그걸 시키냐고 묻지 않고 그냥 자신의 남동생에게 시킬까? 엄연히 김지영의 언니는 김지영의 남편보다 손윗사람이다.김지영의 엄마 역시 남녀차별의 희생양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4. 김지영이 나중에 시어머니가 된다면(영화에서는 딸만 1명 있는 상황이라 불가능하겠지만) 김지영 같은 며느리를 보면서 과연 뭐라고 할까?
5. 김은영(김지영의 언니)은 자신의 남동생이 괜찮은 남자가 된 것은 모두 자신 덕분이라고 하는데, 남동생은 정말 괜찮은 남자이고 괜찮은 남편이 될까? 대부분의 시누이가 자신의 남동생은 괜찮은 남자(남편)라고 말하는 씁쓸한 상황을 여러 번 보았다. 20년 넘게 같이 산 누나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아빠에게 물어보는 남동생, 과연 그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6. 김지영의 할머니는 김지영아빠를 제외하고는 다른 아들들과 왕래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엄마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고 말하고, 삼촌(숙모)들은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를 외면한 불효자식이라고 한다. 다들 본인 부모(특히 엄마)만 희생의 아이콘이다. 그렇다면 부모를 외면한 냉정하고, 불효 막심한 사람들은 도대체다 어디에 살고 있는 걸까?
7. 김지영과 남편은 왜 결혼을 하면서 출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상의하지 않고 결혼을 한 것일까?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변화는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얘기는 하지 말자. 인생의 중요한 것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법이다.
8. 김지영이 상사 앞에서 본인은 임신과 출산을 하더라도 잘해나갈 수 있다고 말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그녀는 별나라에서 온 걸까? 현실 가능한 대안들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는 자신감은 의미가 없다. 그 현실이 정당하다는 게 아니다. 김지영은 그 부당한 현실을 조금도 바꿀 노력은 하지 않고, 그저 본인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는듯하다.
그녀는 출산 전에 그저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본인과 비슷한 선배들을 수없이 봤을 텐데, 과연 느낀 게 없을까?
9. 김지영은 왜 시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할까? 그녀는 왜 아무도 깨우지 않아도 새벽에 일어나 음식 장만을 할까? 누가,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김지영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가사일을 시켰다. 시댁에서 김지영이 부엌일을 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영향일까? 김지영의 시어머니와 김지영의 어머니는 과연 다를까?
10. 육아를 하면서 그토록 우울하게 설정했던 김지영과는 반대로 육아휴직을 한 남편이 놀이터에서 딸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그렇게 행복하게 설정했을까? 여자는 육아를 하면 우울하고, 남자는 육아를해도 전혀 우울하지 않는 걸까? 남편 역시 육아휴직 후에 본인 직장에서의 위치, 커리어를 걱정하면서 우울할수도 있다.
너무 대조적으로 묘사하는 육아를 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 아빠가 육아를 하면서 우울하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의 글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무자녀 부부이다. 그래서 자녀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 우주를 다 얻은 것 같은 황홀함은 느껴본 적이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과 체력소모, 우울감 역시 느껴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의 이런 주장에 "애도 없는 니가 뭘 알아?", "입으로는 뭔 말을 못 해?"라고 대응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난 나에게 뭐가 어울리고 무엇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백 번, 수천번을 더 고민하고 결정했다. '그저 결혼하면 어떻게 되겠지, 아이는 낳으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주위에서 어떻게든 되는 경우도 간혹 보았지만, 그 운이 좋은 경우가 나에게 해당할 거라고 단정하고 돌이킬 수 없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는 건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82년생 김지영> 책과 영화를 모두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면서 계속 느꼈다. 김지영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과연 누굴까? 과연 가해자가 남성이기만 할까? 딸에게 무관심했던 가부장적인 아버지일까? 아내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던그녀의 남편일까? 본인의 가족(아들)만 생각하는 그녀의 시어머니일까? 아닐 것이다. 김지영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가사일을 돕도록 만든 그녀의 어머니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대책과 깊은 고민 없이 자신의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버린 그녀 자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출산과 양육을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지만... 슬프게도 어떤 국가와 사회도 개인의 삶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