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상혁 Sep 26. 2024

벗어나는게 아니라, 나아가는거야.

그러고보면 가장 벗어나야 했을 때, 나는 세계여행을 꿈꿨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세계여행이라는 꿈을 갖기 시작한게.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였다. 나는 당시 신입생들끼리 모여 시시덕거리는 그룹채팅방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떠들던 애였다. 새학기는 3월에 시작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지긋지긋한 집을 벗어나 서울에 혼자 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만큼 가족과 함께할 좋은 시간도 없었는데.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합격했다고 해서 극적으로 엄마와 나, 누나와 나, 아빠와 나와의 관계는 변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도 그대로였다. 엄마는 뭘 그렇게 급하게 서울로 가냐며 뭐라 했었던 것 같지만, 나는 끝내 서울에 있는 고시원이라도 구해 빨리 집을 나왔다. 



멋드러지는 대학생이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대학생이 되면 하고싶은 것은 다 할 수 있는 멋진사람일 줄 알았다. 나는 주변 친구들이 멋있다고 할만한 활동들은 다 했다. 신입생이 되자마자 학번대표가 되었다. 학번대표가 되어서 같이 아이맥스 영화보자고 50명한테 개인톡을 찔러 원정대를 모으고, 어버이날이 되면 팻말을 만들어 모두가 각자의 부모님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이벤트를 기획했다. 즉석 노상파티를 그날 단톡방에 기획해서 올려 새내기 동기 열댓명을 데리고 학교 중앙광장에 가 짜장면을 먹고 무한도전에서나 할만한 게임들을 했다. 나는 대학생 낭만의 표본. 아니 그 표본이 되어야 한다는 열정에 불타있었다. 학번대표가 끝나고 사람에 질린 나는, 그래도 사람을 찾아다니며 매일매일 술을 마시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러 떠났다. 25일동안 1600키로미터, 서울에서 부산을 지나 부산에서 강릉을 지나 다시 서울, 그리고 아빠가 살던 광양까지 마쳤던 그 여행동안, 나는 페이스북 좋아요를 받기 딱 좋은 사진들과 기록들을 모았다. 



걷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대학생이 되고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했던 것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북촌 삼청동을 혼자 겨울에 걸었던 기억이다. 그 때는 에어팟도 없었으니 선이 있는 헤드폰을 끼고, 김광석 음악같은 노래들을 들으며 이 골목 저 골목 걸었다. 그 때의 운치가 내 몸에 여전히 남아있다. 차가운 공기 속에 시원한 하늘이 펼쳐져있고, 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북적 북적 다니는데도 이상하게 고요했다. 그러다 중간에 들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은 그 행복이 영원할 것같이 느껴졌던 것 같다. 아무데서나 걸을 수만 있다면, 난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무지 좋아했다. 내가 대학생의 낭만을 찾아다닌 건 아마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싶어서였을거다. 대학교 때 새로운 친구, 새로운 선배와 후배와 만나 밥을 먹으면 나는 할 이야기가 넘치길 원했다. '너는 대학교에 와서 뭘 하고싶어?' 라는 질문에 누구나 제대로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기대와 다르게 대부분의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은 하고싶어하는게 없이 대학교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의 나는 패기로웠는지 '아 사람들은 원래 별 생각없이도 잘 사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고싶어하는게 없을 수 있지? 하고싶어하는게 뭔지 내가 반드시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 또한 정말 하고싶었던게 있었던걸까? 내가 했던 여행, 내가 했던 활동, 내가 하려고 했던 것들 모두 페이스북에 사진을 눌러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내가 채우고자 하는 대학생의 낭만은 홀로 있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이만큼 하고싶은게 넘치고, 그걸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정신없는 인정욕구였다. 



그 때부터 난 두려워했던 것 같다.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는 것을. 많이도 벗어났다. 학생회장을 하다 사퇴를 해봤다. 인도여행을 다녀오고 하고싶은 것을 찾겠다고 휴학도 총 3년을 했다. 대학교에선 이룰게 없다고 생각해서 사회적 기업을 들락날락 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난 계속 두려웠다.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는 것을. 은근히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벗어나고 싶어했다. 사실 학번대표를 할 때도, 나는 처음에만 인싸처럼 지내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내가 하고자하는 걸 위해 사라지며 '걔 어디있지?'라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신비주의 아싸가 되고 싶었다. 은근히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는 나의 모습을 또 사람들이 알아주길 원했다. 내가 사라지면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사라진 후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찾는 것에서 만족을 찾았다. 



더 벗어났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카카오톡 계정을 몇 번이나 지웠는지 모르겠다. 10년이 넘어도 카톡의 묘한 눈치보는 것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아예 없애고 피처폰으로 바꾼 적도 있었다. 변기에 빠진 스마트폰 대신 스마트 워치를 셀룰러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벗어나는 것은 행복했다. 지하철에서 페이스북, 인스타, 카톡을 신경쓰느니 책을 읽는 것은 내가 기억하는 행복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다. 스마트 워치로 코난처럼 무전하듯 전화했을 때 친구들이 '아이 씨 이 형 진짜' 하면 은근 기분이 좋았다. 난 끝까지 벗어날테니, 날 찾을테면 너희가 찾아와라. 벗어나는 것은 친구를 감별하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찐한 친구들만 내 곁에 남았다. 나는 여전히 벗어나는 척 했으나, 사실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가장 벗어나야 했을 때, 나는 세계여행을 꿈꿨다.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의 대열에서 이미 벗어나 있으면서, 더 벗어나야 했을 때. 나는 세계여행을 꿈꿨다. 사람들 눈치보면서 쓸 데 없는 생각과 반성에 벽을 높이 세우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벗어나 있으면서, 더 벗어나야 했을 때. 나는 세계여행을 꿈꿨다. 더 벗어나기만 했다면 난 세계여행을 이미 한 번 다녀왔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벗어나있는 상태에서, 그래도 누군가가 나를 다시 안으로 들어오라며 불러주길 바랐다. 내가 더 벗어나면 영영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내 마음에 있었다. 벗어난 나 자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없었다. 벗어난게 버려진 것 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벗어난게 버려진 것처럼 느껴져서. 나를 다시 가져가주길 원했던거야. 그렇게 자꾸 소리지르면서 더 벗어나는 척 연기를 한거지. 




근데 아무도 날 다시 가져가주진 않아. 누가 날 가져가줘. 니가 여기까지 벗어나놓고 말이야. 너가 거기서 더 벗어나지 않으면 너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야. 영영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 내가 더 벗어날까 주저하려고 했던 바로 그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겨야지.그래야 더 이상 버려지는 것도 아니고,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는 것이 될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