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타니 신스케
죽음에 대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가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말을 꺼내는 순간이 두렵고 어려운 이유는 누군가를 보내는 순간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인연의 사람도, 짧게 스쳐가 만남도, 사랑하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의 죽음도 그 일을 대면했을 때 숙연해지고, 많이 슬퍼진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든, 아주 오랜 시간 걸쳐 서서히 다가온 이별이든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을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일이 나는 많이 무섭다. 그래서 해리포터의 볼트모트처럼 나는 그 이야기를 입에 담기가 어렵다.
'이게 정말 천국일까?'는 초등 저학년을 위한 그림책으로 분류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나도 초등학교 때쯤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막연하게 알기 시작했던 것 같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고, 나의 부모님이 세상에서 사라져 혼자 남게 될까봐 걱정하며 내가 자립할 때까지 만이라도 우리부모님이 꼭 살아 계셔달라고 몰래 기도도 했었다. 나의 아이도 죽음에 대해 알기 시작하면서 두려워 하기 시작했다. 이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만큼이나 아이에게 미지의 세계인 듯하다. 그러나 생명의 탄생은 아름답고 신비한 반면, 죽음은 극한의 이별이라 아이를 두렵게 한다. ‘이게 정말 천국일까?’는 죽음으로 만들어지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죽은 할아버지와, 아직 살아갈 날은 많은 그러나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잃어버린 손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이 닥쳐오는 걸 느낀 할아버지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작성한 '죽음 일기장'을 읽다보면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천국에서 뭐할까?"라는 책을 손자가 읽는다. 그 안에는 죽고 난 뒤 일련의 과정을 생각한 내용부터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라던가 '다시 태어나면 되고 싶은 것', '이런 무덤을 만들어 줬으면', '이런 기념품을 만들어 줬으면'... 등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 공책을 읽으며 아이는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간 천국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할아버지는 죽음을 기다렸던 걸까? 라고 그리고 다시 "혹시 그 반대였을지도 모르죠. 할아버지는 어쩌면 죽는게 무지무지 슬프고 엄청 무서웠을지도 몰라요."라고 어쩌면 그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는 할아버지처럼 천국에서 뭐할까? 공책을 만들었지만 머리 속에는 지금 현재 뭐하고 놀까? 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든다며 공책을 두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면서 잠투정으로 울었다. 자기가 죽을까봐 무섭다고 눈물을 줄줄 흘려 엄마를 기막히게 했다(그럴때면 똑같은 고민으로 울었다는 아빠가 아이를 위로해준다.). 때론 "엄마 언제 죽을꺼야?"라고 물으며 그리고 한날 한시에 죽자고 한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그래.. 그러려면 엄마 오래 오래 살아야 겠네." 그리고 가끔 길을 걷다 횡단보도 앞에서 물어 본다 ."엄마 다음에 무엇으로 태어날꺼야?" 그럼 나는 대답한다. 엄마는 돌. 너는 뭘로 태어 날꺼야?", "나는 새로 태어 날꺼야."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잠시 있다가 내가 말한다. "엄마는 큰 바위가 되어 있을께. 새가 되어 훨훨 자유롭게 날다가 너가 엄마바위에 집을 지어서 살아."그러면 엄마 하고 안긴다. 그러다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면 동생과 신나게 킥보드를 타며 새처럼 날아간다.
죽는다는 건 무얼까? 고통이 수반될 수 있고, 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영영 볼 수 없는 일이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이미 죽은 탤런트의 드라마를 본다. 그들은 그 안에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계속 기억된다면 말이다. 죽지 않고 평생 만날 수 없는 다른 나라에 산다는 건?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둘째아이가 “엄마 사람들은 죽지 않고는 살수 없는 거야? 왜 죽어야 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음... 음.. 그럼 사람이 너무 많아지지 않을까?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살 세상이 없어지잖아.”라고 대답한다. 맞는 말일까? 앞으로는 아주 아주 오래 사는 세상이 되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덤덤하게 세상과 삶의 순환을 받아들일 것인지, 일정한 수준의 건강을 유지하며 계속되는 삶을 유지하고 싶을지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나는 욕심을 내게 될까?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주변의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많이 슬퍼하지 않는 시기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딱 그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정도의 시기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이 자체가 욕심이겠지. 아직은 어린 두 아이에게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여서 건강하고 바르게 곁에 꼭 있어 줘야 할 때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렇게 하나씩 생각하면 내가 이세상에 고리를 만들고 있는 한 필요하지 않은 시기는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쯤 죽고 싶을까? 조금 더 죽음에 대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