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따뜻한 방 안에서 까서 먹었던 어린 시절 귤의 맛은 잊을 수 없다. '82년생 김지영'을 썼던 작가에게 '귤의 맛'은 무엇인지 궁금해지면서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새콤함 귤의 향기가 코끝에 맴도는 기분이 된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귤을 어떠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귤을 좋아하긴 하지만 마트에서는 사 먹지 않아요. 요즘은 제주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시는 분과 직거래를 통해 구입한 거 아니면 손이 잘 가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할 것이다. 어쩌다 마트에서 파는 귤을 먹으면 밋밋한 단맛만을 느낄 수 있다.
귤만 그런 게 아니다. 상추도, 사과도, 감도, 참외도 그렇다. 마트에서 사면 이런 과일이나 채소는 겉 가죽만 그 이름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씹으면 비슷한 맛이 나긴 하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 먹었고 알고 있는 깊은 그 이름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직거래나 집에 만든 작은 텃밭, 친정의 밭에서 나온 채소나 과일을 먹으면 비로소 내가 알았던 그 친구 본연의 개성을 입안 가득 품게 된다.
중학교 시절을 지나 고등학교로 가는 소녀 4명이 있다. 성격도 다르고 자라온 집안의 분위기도 다른 4명은 어쩌다 같은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서로를 알게 된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소위 말하는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인 아이들은 제주도의 여행에서 다 같이 지금 다니는 중학교 인근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가기로 결의를 다진다. 그리고 1년 뒤 막상 그 고등학교를 가려니 이래저래 현실과 마음에 부딪히는 소녀들, 그래서 그때 그 약속과는 다른 선택을 하려고 하는 아이들에게 누군가가 훼방을 놓는다.
어른들은 자꾸 구분하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단순히 묶이지 않는다. p. 41
책은 10대 소녀들이 겪을 법한 우정에 관하여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나는 10대 소녀시절 친구들 간에 얽히고설킨 감정들 속으로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똘똘 뭉쳐있는 듯 보이지만 속 깊이 들여다보면 이리저리 감정적으로 엃혀있고 싫은 점들이 존재하고, 약간의 비밀도 존재한다. 그래서 사춘기의 우정은 위태롭다. 10대들의 우정과 성장을 끓여내는 냄비에 가족의 문제라는 짜디짠 간장 양념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시절 우리의 우정은 가족의 무게를 넘어서서 존재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치밀한 타 고등학교 진학 방해꾼이라는 미스터리가 다시다처럼 첨가되어 팔팔 끓여진다.
가족문제와 우정으로 이루어진 성장이라는 주제는 청소년 소설의 단골 소재이다. 청소년 소설은 '성장'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무엇을, 어떻게, 어디로, 이루는 것인가를 다루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흡입력은 완전히 달라진다. 귤의 맛은 우정, 가정문제 , 성장이라는 이야기에 고등학교 선택, 학군, 학원, 해외유학 등 우리가 뉴스나 학원, 동네에서 익히 들어온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으로 집어넣어 묘하게 기분 나쁜 감정과 몰입감을 함께 준다. 묘하게 기분 나쁜 감정은 나의 치부와 속물적인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은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초록색일 때 수확해서 혼자 익는 귤, 그리고 나무와 햇볕에서 끝까지 영양분을 받은 귤, 이미 가지를 잘린 후 제한된 양분만 가지고 덩치를 키우고 맛을 채우며 자라는 열매들이 있다. 나는, 그리고 너희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p. 161
완전히 익지 않는 과일을 따서 덩치를 키우고 익게 하면 겉모양은 그 과일을 모양을 하고 있을 수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진짜 그 과일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에 뿌리로부터 시작되어 가지와 잎 사이에 어우러져 바람과 햇볕을 받고 자란 귤의 맛은 진짜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기억하는 그 맛은 아닐지 몰라도 어른이 되어 감별력이 생기면서 이 맛이 진짜 과일 맛, 채소 맛이라는 걸 그냥 알게 된다. 처음에 책을 읽으면서는 나무와 햇볕이 부모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아이들이 익을 때까지 영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고.
다시 보니 뿌리는 부모일지도 모르나 햇볕과 바람, 비는 부모라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도 튼튼해지고 그 끝에 맺힌 열매도 제대로 맛을 낼 수 있다는 기본 가정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귤은 제주에서 뿌리내려 열매를 맺어야 제 맛이다. 제주의 토양과 온도, 바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부모라는 뿌리가 튼튼하려면 우리 사회가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결국 그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흔들리고, 아프고, 지치면서도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는 네 소녀의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은지는 처음으로 잘못하지 않아도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일에 영향을 받고 책임을 지고 때로는 해결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도 p.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