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용손 이야기'라는 제목을 보고 잠시 생각한다. 용손이 뭘까? 그리고 그림을 본다. 뱀의 비늘 같은 것이 책의 중앙을 구불구불 기어가듯 그려져 있고, 그 옆에 깜장 팬티만 입은 아이가 고개를 살짝 내리고, 등에 손을 올리고 있다. 손이 용손이라는 걸까? 용손은 뭐지? 표지가 힌트를 주는 것 같은데도 용손이 뭔지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보니 소년이 올린 손이 위치한 등에 초록색의 고불고불한 선이 비늘처럼 그려져 있다. 그리고 소년의 주변에는 깜짝 놀란 것처럼 보이는 초록색 얼굴들이 번개 같은 것에 들어가 있다. 내가 왜 그렇게 놀래서 다시 책의 표지를 봤냐 하면 '용손'이 '용의 자손'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책을 읽다가 알았기 때문이다.
용의 자손과 결혼한 아버지, 그리고 용의 자손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나'가 있다. 용의 자손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 조금 자라면 등의 한가운데에 작은 비늘이 몇 개 나는 것과, 기분이 들쑥날쑥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는 것 외에는. 이렇게 놀라운 상상력이라니. 그렇다. 나는 곽재식 작가님의 책을 처음 읽어본다. 공학박사이면서 글을 쓰는데 글은 주로 SF소설이고, 엄청난 다작으로 유명하시다는 이야기를 흘러 흘러들었었다. 다작, 공학박사, 남자, SF 뭐 그런 것들이 종합되어 나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벽이 있었는데 이 책으로 와장창 깨졌다.
유쾌하고, 따뜻하고, 귀엽다. 용의 자손인데 할 줄 아는 건 기분에 따라서 비가 내리는 것 밖에 없는 소년과 엄마. 그런 두 사람에 의해서 생기는 일은 이 이야기에서는 웃음이 묻어나는 지점이 된다. 소년은 사춘기가 오면서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비 오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스스로 기상청에 전화하여 알려준다. 비예보를. 자신의 감정 기복으로 인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던 소년에게 바야흐로 첫사랑 소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언제 보아도 그 전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신감 있고, 여유 있는 태도는 존경스러웠고, 가끔씩 당황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은 친근하고 재미있는 성격처럼 보였다. 안경을 쓰고 책을 읽을 때에는 진지하고 성실해 보였고, 안경을 벗고 졸려하는 모습은 느긋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신고 있는 구두도 우아해 보였고, 듣고 있는 음악은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노래였다. 어떻게 저렇게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잘 알고 잇을까 싶었다.
서글픈 것은 나는 반대로 좋은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등짝에 있는 비늘 모양을 빼면 나는 주변 누구와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남학생일 뿐이었다. p.51
용손의 첫사랑은 '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나'의 마음이 짝사랑하는 소녀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그때마다 비가 엄청나게 내린다. 소년은 걱정이다. 자신이 속한 마을이 자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 봐. 기상청에 꼬박꼬박 전화를 하지만 이것만으로 여의치 한다. 그런 용손의 상태를 눈치챈 평범한 아버지가 충고한다.
"좋아하는 여자 있으면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야. 어릴 때 그런 고백도 해봐야지. 하다 못해 망해도 피해도 적고. 그 뭐냐, 첫사랑은 다 안된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저질러 놓고 거절당하면 그러려니 하면 된 다니까. 다들 그런 거거든. 그런 걸로 놀리는 사람도 없고, 설령 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봐야, 걔가 이상한 거지." p.68
소년은 고백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전에 할 일이 있다. 기상청에 연락해서 지역주민의 피해를 최소화를 위한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혹시 거절당했을 때 감정을 추스를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기상청과 시청에 글을 올렸다. 국지성 폭우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으므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질 때를 대비해서 하천에 만들어 놓은 홍수 방지용 둑을 더 높고 튼튼하게 긴급 보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p.71
기발하고, 평범하고, 경쾌하다. 눈앞에 놓인 나의 문제보다는 마을을 걱정하며 꼼꼼하게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는지 확인하고 투서를 보내는 소년의 마음이 너무 좋다. 나라면 이 소년에게 홀딱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나의 능력을 나쁘게 쓰거나 내세우지 않고, 남의 탓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소년의 모습. 첫사랑 소녀를 향한 배려 깊은 짝사랑.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문제가 될 만한 것은 미리 알아내어 타인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소년의 마음. 용손보다 오히려 이런 소년이 판타지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런 소년같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면 좋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드는 책이다.
이 이야기는 차근차근 읽어가는데도 정신없는 느낌이 난다.이런 재기 발랄한 이야기도 좋다. 앞으로 마음에 구름이 드리워지고, 비가 내리는 날 곽재식 작가님의 책을 찾아 그가 전하는 수다스러운 이야기를 읽으면 위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