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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제비 - 열 번째 소식

T형 인간의 대화 알고리즘/밴드/어린 감/Royel Otis

by 릴리리

[오늘의 스토리]

나는 문과지만 T형 인간이라 어떤 현상을 보면 반드시 ‘왜?’, ‘그래서?’를 생각한다. 원인과 결과다. 사회적 이슈나 사건 사고를 접하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범인은 잡혀서 어느 정도의 형을 받았는가? 피해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나? 올바르지 못한 현상은 해결이 되었는가? 불합리했던 법과 정책은 개선되었는가?)를 꼭 찾아본다.

누군가 울고 있으면 나의 로직은 이렇게 작동한다.

1.왜 울고 있는가?

(이유)

2.그게 울 만한 일인가?

(네) 정말 슬프겠구나. 위로나 해결책으로 슬픔을 극복하도록 도와줘보자.

여기서 (아니오)라는 답이 도출되었을 경우 조금 복잡해진다.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친밀도가 낮은 경우엔 “그랬구나, 정말 슬프겠네.” 등으로 영혼없는 위로를 한다.

친밀도가 높은 경우엔 ”그 정도로 뭘! 힘내보자!“하고 솔직한 심정을 말하거나

”그랬구나. 너는 그게 슬프구나. 그럼 OO해보는 게 어떨까?“하고 이해는 되지 않지만 상대방의 슬픔을 존중한 후 해결해 보려고 한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는 ’무조건적인 공감과 위로‘를 바라는 케이스와 ’해결책 제시를 원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게 돼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해결책 제시는 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사회 생활을 하며 쌓인 데이터로 나름대로 대화의 알고리즘을 갖추어 놓았다.

칭찬을 들으면 상대방에게도 칭찬해 주기, 아는 주제가 나와도 잘난 척 하지 않기(어렸을 때는 지식을 말하는 게 좋아서 본의 아니게 잘난 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등등.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대화의 알고리즘을 만들어 놓고 말하면 AI와 사람이 다른 게 뭘까?

인간은 감정이 있고 스스로 생각한다지만, 원만한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 남들이 원하는 대답과 반응을 어느 정도 준비해놓고 있다면 그게 결국 AI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 물론 욱해서 반응할 때도 있긴 하지만. 그건 오히려 인간의 단점이 아닌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도 밥을 먹고 대변을 본다.


[오늘의 물건]

밴드를 항상 들고 다닌다. 중학교 때부터 밴드를 들고 다녔는데, 누가 손이 베거나 다쳤을 때 가방에서 짠 하고 꺼내들면 그 쾌감이 참 좋았다. ‘역시 쓸모가 있었구나’라는 느낌이다.

예전엔 화장품 파우치 안에 몇 개씩 넣어 다녔는데, 화장품과 섞여 이리저리 구르다보니 쓰지 않았는데도 귀퉁이가 해지고 너덜너덜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은 밴드전용으로 납작한 투명 파우치 안에 넣어 다니고 있다. 밴드도 깔끔하게 보존하고 찾기도 더 쉽다. 요즘은 다이소에서 귀여운 패턴의 밴드를 많이 팔아서 좋다.


[오늘의 풍경]

어린 감을 보았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집집마다 마당에 감나무를 많이 키웠는데, 키우기가 쉬워서라고 한다. 아직 여물지 않은 초록색 감을 보고 우리 집 아들(만4세)은 매실이냐고 물었다. 매끈하고 싱그러운 감이 예뻐서 오래도록 보았다.


[오늘의 음악]

Fade Into You(Apple Music Sessions) - Royel Otis

로열 오티스는 호주 시드니 출신의 기타 팝 듀오로, 인디 팝, 인디 록, 뉴웨이브, 팝 록, 포스트펑크, 사이키델리 록 등의 음악 스타일을 아우른다(고 위키피디아에 소개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다 모아놓은 ‘취향 모둠’ 같다.

이 곡은 특히 기타 팝의 서정적이고 나른한 분위기가 잘 살아있어서, 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화창한 날 나무 그늘 밑에 누워서 듣고 싶은 곡이다.

2024, ORNESS PTY LTD

발행의 변(辨)

: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는 제비처럼 소소한 일상 소식을 나르는 매거진. 종종 하잘것없지만 복잡한 세상 속에서 피식 웃을 수 있는 모먼트를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월-금 주 5회 발행. 공휴일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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