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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리 Jun 27. 2019

얼음의 철학

데일리릴리리 003.


때는 바야흐로 얼음의 계절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꼭 상온의 물을 한 잔 마셔야 하고 평소엔 냉장고 물이 너무 차가워서 마시지도 않지만 여름엔 얼음을 넣은 아메리카노 한 잔 만큼 맛있는 게 또 없다. 얼음이 가득 들어있는 차갑고 씁쓸한 커피를 꿀꺽꿀꺽 마시면 그 어떤 음료로도 가시지 않던 갈증이 싹 달아난다. 뜨거운 여름날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기에 좋은 음악과 시원한 에어컨이 있으면 그곳이 곧 파라다이스다.

아메리카노에 들어가는 얼음은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않아야 한다. 너무 작으면 얼음이 너무 빨리 녹아버리고, 너무 크면 충분히 녹지 않아 아쉽다. 그냥 가정집 냉장고에서 얼릴 수 있는 각얼음이면 무난하다. 그걸 커다란 잔 가득 채운 다음(이 잔은 반드시 투명해야 한다!) 방금 내린 진하고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끼얹어준다. 적당히 차가운 물을 부어준다. 이 때 더하는 물은 냉장고에서 갓 꺼낸 아주 차가운 물이 좋다. 미지근한 물을 넣으면 얼음이 그만큼 빨리 녹기 때문이다. 이걸 금방 마시지 말고 빨대로 휘휘 저어 에스프레소가 충분히 차가워지도록 한다. 급하다고 마시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차갑고 진한 맛을 느낄 수 없다.

에스프레소가 차갑게 식으면 그 때 빨대로 마신다. 입을 대고 마시면 왠지 맛이 살지 않는다. 종이빨대는 종이맛이 나서 안된다. 과거엔 일회용 빨대를 많이 썼지만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는 환경오염의 주범 중 하나이므로 요즘은 설거지할 수 있는 다회용 빨대를 쓴다. 얼음으로 차가워진 커피를 빨대로 쭉쭉 빨아올리면 그만한 상쾌함이 없다. 탄산이 주는 청량감과는 또 다른 청량감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맛있다, 생각하면 왠지 내가 정말로 다 큰 어른이 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이들은 모를 맛이다.

얼음이 녹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도 좋다. 얼음이 녹아 묽어진 커피를 마시는 것도 나름 괜찮다. 씁쓸한 아메리카노 뒤의 입가심으로 딱이다. 에스프레소를 얼려 커피얼음을 주는 곳도 있지만, 그냥 투명한 얼음도 좋다.

위스키의 온더락에 들어가는 얼음은 커야 한다. 어릴적 가지고 놀던 고무공 정도 크기의, 둥글둥글한 얼음이면 딱이다. 바텐더가 아이스픽으로 정성스럽게 깎아낸 얼음이면 좋겠지만 다이소 같은 곳에서 파는 하나짜리 둥근 얼음 큐브면 딱이다.

온더락에 들어가는 얼음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들어가는 각얼음이면 너무 빨리 녹아버린다. 위스키는 얼음을 금방 녹여버리기 때문에, 순식간에 위스키가 묽어져 버린다. 그런 얼음이 들어간 온더락을 마실 바에는 차라리 물을 넣는 편이 낫다.

어릴 적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 위스키에 들어가는 얼음에 대한 하루키의 철학이 등장한다. 하루키는 전업소설가가 되기 전 재즈바 비슷한 가게를 운영했었다. 그러면서 매일 아이스픽으로 온더락용 위스키 얼음을 깎았다고 한다. 너무 작아도 너무 커도 안 되는 그런 얼음을.

그 얘기는 어린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금방 녹아버릴 얼음 하나에도 이렇게 장인정신을 담는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다. 특별한 롤모델이 없는 내게 하루키는 일종의 롤모델이었다. 스물아홉이 되면 나도 날아가는 야구공을 보다가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해야지, 그렇게 쓴 첫 소설로 큰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해야지, 대학에 가서는 장래희망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과목을 전공해야지...

따지고보면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는 아주 잘못된 롤모델이었다. 나는 스물아홉에 단편 작품 하나 완성하지 못했고, 내는 작품마다 탈락의 고배를 마셨으며, ‘아무도 안 내주면 내가 직접 내겠다’는 심정으로 독립출판을 했다. 개나 소나 책을 내는 세상에서, 나도 그 개나 소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하루키가 알려준 것들 중 가장 바람직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위스키 온더락에 들어가는 얼음 크기의 중요성이었다.

물론 직접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를 다니면서 알게 된 건, 정작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마시는 스코틀랜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였다.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들은 첫 모금만 스트레이트로 음미하고, 물을 섞어 마셨다. 그게 위스키의 풍미와 향을 더 즐길 수 있다며. 답은 ‘자기가 좋아하는대로 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온더락으로 마시는 게 좋다. 따끈하게 데운 술도 특유의 향과 풍미를 즐길 수 있어 좋지만(특히 일본주 같은 경우엔), 기본적으로 술은 차가운 게 좋다.

위스키가 마시고 싶은 밤이다.




 

좋아하는 위스키는 라가불린, 좋아하는 얼음은 냉장고에서 딱 이틀만 얼린 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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