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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리 Jul 19. 2019

바닷가 마을에 산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찾아서

10년을 넘게 서울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흔히 제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을 떠올리곤 했다. 내 경우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서울을 꿈꿨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지방대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나에게 그곳은 너무도 좁고 답답한 곳이었다.


98년도에 트라이포트 페스티벌이란 것을 했다. 초등학생 꼬꼬마이던 나는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아마 서울에 살았어도 너무 어려서 가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겠지만. 아무튼 그 후에 있었던 크랜베리스의 공연이나 다양한 문화예술행사는 죄다 서울과 그 근방에서 열렸다. 보고싶은 영화의 상영관은 언제나 서울에 있는 '하이퍼텍 나다'였다.


초등학교 시절 꿈은 라디오 디제이였다. 서울말을 연습했다. 내가 살던 지방에선 서울말을 쓰면 재수없다며 삼삼오오 모여 애들끼리 욕을 해댔지만, 그 때도 '개썅마이웨이'였던지라 개의치 않았다. '나 오늘부터 서울말 쓸 거니까 니들이 이해해줘.' 친구에게 그런 편지를 썼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마 나는 키도 크고 얼굴도 좀 무섭게 생겼으니까(그 땐 깨닫지 못했다) 토를 달거나 대놓고 놀리거나 하는 애들은 없었다. 아마 뒤에서는 '이상한 년이네'하고 수군댔을지는 몰라도.


때문에 내 정체성은 오롯이 서울이었다. 방학이면 서울에 있는 외갓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처음 '실버'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중학생 때 일본음악에 빠져있었다. 일본문화 개방 전이라 일본 수입음반은 음반점이 아니라 지하상가나 좀 음침한 건물 오피스텔 같은 곳에서 유통됐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시내 지하상가에 대만판 짝퉁CD와 일본 정품 CD를 파는 가게가 두어 군데 있었는데, 일본 정품은 보통 15배를 받고 팔았다. 실버 같은 곳은 12배 정도 했다.


실버는 서울 강남 어드메에 있던 가게였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 날 엄마아빠를 졸라서 부모님을 대동하고 그곳을 찾았다. 주소대로 찾아갔는데 도저히 상점이 있을 것 같지 않은 허름하고 지저분해 보이는 빌딩이었다. 뭔 마약이라도 불법 거래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무튼 주소는 맞으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으로 치면 오피스텔 한 호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꼴이었는데, 어린 내가 그런 걸 알았을리 없다. 가게도 매우 좁았다. 구경을 하는둥 마는둥 하고 아무 것도 안 사고 나왔다. 중학교 1학년짜리가 사기에 4만원에 육박하는 CD는 너무 비쌌다. 모아놓은 용돈은 있어도 엄마아빠 눈치가 보였다.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혼자 이런 곳에 올 수 있다면, 서울에 산다면 자주 올텐데, 생각했다.


서울로 대학을 갔다. 외국문화에 빠져있던 내게 전국 각지,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있는 대학교는 천국이었다. 얼굴만 돌리면, 손만 뻗으면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일 사람들과 진탕 술을 마셨다. 여차저차 미국도 갔다오고 호주도 갔다오고 일본도 갔다왔다. 어린 시절 그렇게 갈구했던 세상을 나는 결국 서울에서 발견했던 걸까? 아니면 나이가 들며 가치관이 바뀐 것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2011년, 하이퍼텍 나다가 문을 닫을 때까지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서울에 10년을 넘게 살았다. 강릉으로 이사온 것은 순전히 남편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책임을 미루기엔 나도 한몫 한 바가 있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서울살이에 지쳐있었다. 서울엔 사기꾼들이 너무 많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사람이 많으니까 좋은 사람도 많고 마음 맞는 사람도 많았지만 병신도 많고 또라이도 많고 사기꾼도 많았다. 남편은 강릉에 가겠다고 했다. 연고 하나 없는 동네였다. 남편도 나도, 팔촌까지 찾아봐도 강릉에 사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종종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었다. 언제나 나를 속박하는 것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1년 가까이 주말부부를 하다 서울생활을 정리했다. 

    

몇 년 동안 회사를 다니다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수업도 듣고 프리랜서로 일도 하고 집필 활동도 했지만 나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 탓인지 성취욕이 강해서인지 우울증에 걸릴 뻔했다. 이 때 내가 의외로 굉장히 회사 체질이란 걸 알았다. 뭐 아무튼 극복했다. 이곳에서 아는 사람도 많이 만들었다. 최근엔 강릉에 사는 것의 장점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1. 남들은 2-3시간 걸려 막히는 차에 진절머리를 내며 바다를 보러 오지만, 여기에 살면 차를 타고 5분이면 바다를 볼 수 있다.

2. 차가 막히지 않는다.

3. 여유롭다. 

4. 순박한 사람들이 많다. 


비슷비슷한 얘기겠지만 그랬다. 이곳 사람들은 확실히 여유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새로운 도로에 진입하거나 차선을 바꾸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영원히 기다려도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달리는 차들을 모두 보내고 나서 들어가도 늦지 않다. 


느긋하게 기다리면 내 자리가 반드시 있다는 건 여유의 핵심이었다. 서울에선 얼른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 와서 앉는다. 


서울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서울의 치열함과 고층빌딩숲과 잘 닦인 넓은 8차선 도로를 사랑한다. 서울에 살면서 가장 좋아했던 일은 텅빈 테헤란로나 도산대로를 차로 달리는 일이었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엔 기회도 많았다. 많은 만남, 많은 문화적 혜택,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치열한 곳에서 부대끼며 사는 것은 이제 20대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내 뇌가 행복회로를 돌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태생이 느긋한 내게 잘 맞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맛집 소개 영상을 봤다. 청담인가 압구정 그 언지에 위치한 술집이 나왔는데, 이 집만의 특별함이라면서 소개한 것이 바로 벽면 가득 비치는 바다 풍경이었다. 크지 않은 가게의 흰 벽면에 비치는 바다 영상을 보며 '술 맛이 난다', '술이 들어가니 진짜 바다 같다'고 하는 그들을 보니 어쩐지 모를 안쓰러울 마음이 들었다. 우린 바닷가에서 술을 먹고 싶으면 택시를 타고 5분 거리의 바다에 나가거나, 조금 더 가면 15분 거리의 경포 해수욕장에서 헌팅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술을 마실 수 있다(지금은 여름 성수기다). 차를 가지고 나가면 돌아올 때는 대리운전비가 1만 원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관광지가 물가는 그렇게 싸지 않을지언정, 대리 하나는 기똥차게 싸다. 


우리는 그 유튜브 영상을 보며 '서울사람들 참 불쌍해, 그지?' 하면서 낄낄거리고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은 꼭 서울을 간다. 필요한 것도 사고 미용실도 가고 사람도 만나고 전시회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한다. 그곳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발가락 하나 정도는 담그고 있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곳 사람들과 다르다'는, 유치하고 옹졸한 선민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내 정체성은 오롯이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이면 아무데도 속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여행와 있는 기분으로 산다. 주인의식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만 나름의 애정은 있다. 이제 나는 내가 태어난 고장보다, 이곳을 훨씬 많이 안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긴 여행이나 다름없다. 천상병 시인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나는 뫼르소를 생각한다. 알제리의 해변이 아닌 강릉의 해변에서. 더 이상 나는 내가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손에는 당길 방아쇠가 없다. 

어느 맑은 날의 안목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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