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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리 Jan 21. 2020

저는 커피펄슨입니다만

차보다는 커피를 마시는 편입니다

내 스무 살은 스타벅스와 패밀리 레스토랑이 한창 유행하던 시기였다. 친구들과 큰 번화가에 자리잡은 스타벅스를 찾아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셨고 생일 쿠폰을 뽑아 패밀리 레스토랑에 갔다. 휴대폰은 있었지만 스마트폰은 없었고 소리바다로 엠피스리를 다운받아 듣던 시절이었다.


난생 처음 간 스타벅스에서 처음 마셔본 캐러멜 마키아토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고소한 우유와 씁쓸한 커피가 입 안에 퍼질 때 쯤 빨대를 타고 올라오는 아찔한 캐러멜 시럽의 단 맛은 매우 중독적이었다. 쓰고 달고, 쓰고 달고. 그건 채찍과 당근이었다. 마냥 달기만 하면 단 맛을 느낄 수 없듯 달짝지근한 캐러멜 풍미는 에스프레소를 만나 더욱 강렬해졌다. 밥 한 끼보다 비싼 커피였기 때문에 자주 마시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을 만나서 가는 캐러멜 마키아토는 그래서 특별했다. 지금이야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게 더 일반적이 됐지만, 그 때는 주문의 대부분이 캐러멜 마키아토였다. 그랬던 시절이었다.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등학교 때 나는 변비로 고생했는데, 3, 4일씩 화장실에 가지 않는 건 기본이었기 때문에 한 번 거사를 치르려면 화장실에 기약없이 앉아있곤 했다. 그럴 때 진하게 탄 커피를 마시면 거짓말처럼 ‘그 분’이 잘 나왔다. 실제로 커피는 변비에도 어느 정도 효능이 있어 관장용 커피도 따로 있다. 물론 관장용 커피를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그것이 내 커피 인생의 시작이었다. 영국 출장 때 영국인들이 보편적으로 마시는 차를 사가고 싶어 마침 주변에 있던 영국여인에게 어떤 차가 인기 있는지를 물었더니 “저는 커피 펄슨이라서요”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후에 “주위에선 보통 이런 걸 마시더라”며 몇 가지 추천을 받긴 했지만, 세상에 ‘티 펄슨’과 ‘커피 펄슨’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은 신선한 구분이었다. 그러고 나는 죽 수 년 간 ‘커피 펄슨’이었다.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스타벅스 같은 곳엘 들락거리며 ‘좀 특별한 걸 마셔볼까’ 싶어 마신 것들 중 기억에 남는 건 모카 커피 종류였다. 모카 프라푸치노나, 카페 모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면서 내 취향을 알게 됐는데, 코코아 파우더를 넣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으며 단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홍삼차도 잘 마시는 날 보며 “쓴 걸 좋아하는구나” 했는데 쓴 걸 좋아한 게 먼저인지 쓴 것에 익숙해진 게 먼저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랑 비슷하지 않을까?

그래서 정착한 것은 역시 불변의 아메리카노다. 에스프레소는 설탕을 넣지 않으면 마시기 어렵고, 한 입에 탁 털어넣는 음료니까 설탕도 넣지 않고 느긋하게 다 식을 때까지 두고 마시는 나한테는 맞지 않는다. 특히 무더운 여름날 투명하고 커다란 유리잔 끝까지 얼음을 채워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최고다. 그럴 땐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물론 에어컨과 좋은 책이 함께라면 금상첨화겠지만.
여기엔 꼭 빨대가 있어야 한다. 유리컵에 립스틱 자국 묻히며 먹기엔 무언가 아쉽다. 쪽쪽 빨아마셔줘야 한다.  

몇 년 전부터 트렌드가 된 아인슈페너는 우리 엄마아빠 젊을 적 유행하던 ‘비엔나 커피’의 원형이다. 우유를 넣은 에스프레소에 달콤한 크림을 올린 커피인데, 차가운 크림이 뜨거운 에스프레소에 녹아들어가기 때문에 빨리 마시는 게 좋단다. 커피를 절대 10분 내로 마시지 않는 나는 차가운 크림만 꿀떡꿀떡 먹고 라테로 즐긴다. 그러면 아인슈페너 마시는 의미가 있나 싶지만 유행하는 건 왠지 맛있고 멋지다. 어렸을 때는 ‘유행 따위’ 생각하며 나만의 길을 갔는데 나이가 들수록 눈치를 보게 됐다. ‘요즘 유행하는 거래’ 하면 일단 겪어봐야 한다. 세상사에 뒤쳐지고 싶지 않은 이 기분은 단순히 지방으로 이사를 가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아메리카노다. 매일 커피콩을 갈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데우며 이 모든 행위를 귀찮아하면서도 커피를 마신다. 일주일에 한두번 쯤은 라테가 마시고 싶어 스팀우유를 만드는 무서울 정도로 귀찮은 짓을 하고야 만다(스티머를 예열하고,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고, 우유를 스팀피처에 따르고, 스팀밀크를 만든 다음 스티머를 깨끗하게 닦고, 스팀을 빼내고). 일련의 행위에 대한 귀찮음에 굴복한 채로 저녁을 맞이하면 왠지 오늘 마시지 못한 커피에 대해 아쉬움이 생기고 만다. 그래서 오후 4시 전에는 늘 커피를 만든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나는 이런 모든 귀찮은 행위를 극복하고 커피를 마시는 내가 좋다. 나라는 사람을 완성하는 것. 취향이란 그런 것이다.





Title image _ Coffee and Cigarettes (2003, Jim Jarmu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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