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스토리지
저장공간이 부족합니다. 저장공간을 확보하거나 추가 저장용량을 구매하지 않을 경우 가까운 시일 내에 이메일을 보내거나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구글에서 공포스러운 메시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98%였고 아직 조금 남았네 싶어 바쁘다고 무시했는데 어느 새 저장공간이 100%를 넘기고 말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총 15기가의 용량 중 사용된 분야는 이러했다.
구글 드라이브 1기가
지메일 1.78기가
구글포토 13.25기가
친애하는 구글 선생은 15기가를 조금 넘긴 정도는 봐주시는 모양이었다. 얼른 구글 드라이브에 들어가 필요없는 파일들을 싹 지웠다. 그래도 용량에 변함이 없길래 휴지통도 비웠다. 그렇게 해서 드라이브를 모두 비웠는데도 구글 드라이브는 무언가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최근항목을 뒤져보니 또 뭐가 나왔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글 드라이브의 파일들은 그림자 분신술.. 아니 은닉술이라도 쓰는 걸까? 아무튼 눈에 띄는 건 다 지웠다.
지메일에 들어가 임시보관함과 쌓여있던 작업 관련 메일을 모두 지웠다. 어차피 대용량 파일들은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 지웠다. 스팸함도 비우고 프로모션함도 비우고 아무튼 죄다 정리했다.
남편은 메일 알림이 뜰 때마다 메일을 확인하는데, 나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메일은 쌓아뒀다 한꺼번에 처리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내 폰에는 언제나 100이 넘는 숫자가 화면에 뜨곤 했다. 남편은 그걸 질색했지만 난 빨간 알림이 없으면 왠지 섭섭한 기분이었다. 결코 게을러서가 아니다! 아무튼 이런 나의 성향을 저주하며 메일함을 정리했다.
그래봤자 구글 드라이브나 지메일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다량의 사진, 사진들이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모두가 신중하게 사진을 찍었다. 어렸을 때는 필름카메라를 썼다. 필름 한 롤은 보통 많아봤자 36장 정도였다. 운이 좋으면 2, 3컷 정도 더 찍을 수 있었다. 여럿이서 찍은 경우엔 꼭 누구 한 명이 눈을 감기가 일쑤였다.
좀 더 커서는 디카를 쓰기 시작했지만, 그것 역시 메모리가 크지 않아 여행이라도 가면 사진을 찍은 뒤에 고심해서 남길 컷을 골랐다. 미리 정리해두지 않으면 꼭 찍고 싶을 때 용량이 부족해 찍어도 저장이 되지 않았다. 디카 자체도 마찬가지였지만, 용량이 큰 메모리는 학생 신분에는 비싼 물건이었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스마트폰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쯤이었던 것 같다. 그 때 한국에 처음으로 아이폰이 정식으로 수입되었고, 내 주변엔 아직 2G 폰을 쓰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리고 카메라의 성능과 하드웨어가 폭발적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이제는 셀카를 찍어도 한 장으로는 끝낼 수 없게 됐고 일상의 끼니조차 피사체가 되었다. 나도 셀카를 한 번 찍으면 수십 장을 찍는데, 이 때 같이 찍는 남편의 지쳐가는 표정을 보는 게 참 재미있다. 여행을 가거나 해도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는 게 습관이 됐다. ‘혹시 모르니까’. 하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면 여러 장을 찍었을 땐 너무나 똑같은 컷들이 많아 오히려 뭘 남겨야할지 고민이 됐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지금의 용량 부족 사태를 만들었을까?
구글의 이전에, 컴퓨터 하드의 용량 부족은 익히 겪던 문제였다. 외장하드는 필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외장하드를 날려 먹은 역사가 여러 번이라(아무리 안정성이 괜찮다고 소문난 하드를 써도 내 하드는 마지막엔 날아가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제는 약간 디지털 데이터의 무의미함에 대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아무튼 그 때문이었을까? 부지기수로 날려먹은 과거 사진들을 오래된 넷북에서 유물 발굴하듯 발굴해내고, 사진 인화 사이트의 저장소에서 찾아내며 역시 백업은 여러 군데 해야 한다는 진리를 뒤늦게 깨우쳤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귀찮아서 실천을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구글포토에 과거 사진을 업로드했다. 그게 모든 ‘용량 부족 사태’의 시작이었다.
구글포토에서는 아이폰으로 업로드하는 고화질 사진과 영상에 대해서는 용량을 무제한으로 제공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이 나를 용량에 더욱 무디게 만들고 말았다. 아이폰에서야 무제한이지, PC에서 올리는 옛날 jpg 사진까지 허용한 건 아닙니다. 구글은 그걸 빨간색의 경고로 내게 알려줬다.
10기가가 넘는 사진을 지웠다. 휴지통도 비웠는데 구글은 고작 2백여 메가가 줄었다고 알릴 뿐이었다.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구글포토에 대해서는 한글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 영어로 된 포럼을 뒤졌다. 나 같은 사람이 좀 있었는데 답변은 하나같이 이미 읽고 읽어 외울 지경인 고객센터의 꽉 막힌 안내멘트뿐이었다.
그러고 뒤늦게 이 문구를 발견했다.
저장공간의 변경사항이 업데이트 되는 데 최대 24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지메일의 가장 위에 뜨는 경고 메시지에, 저장공간 부족을 알리며 저장공간을 확보하거나 추가 용량을 구매하라는 문장의 맨 뒤에 있었다. 역시 뭐든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과거엔 앨범 몇 권에 인생이 담겼을텐 데, 이제 기가 정도로는 한 사람의 삶을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사진보다 영상을 많이 찍으니까, 테라 정도는 우습게 가겠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쉽게 사라질 추억은 어딘가 우습다. 그만큼 추억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가벼워졌을까? 그래도 필름카메라를 쓰던 시절이나 하루에도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대는 지금이나, 들여다보면 즐겁고 행복한 기억은 마찬가지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다른 누군가의 인생에서, 몇 퍼센트나 차지하고 있을까? 추가 용량을 구매하면 그 사람의 마음 속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Title image _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Michel Gond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