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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몬 Oct 09. 2024

아침 10시, 학교폭력이 접수되었습니다.

FUCK THE SCHOOL

내 것이 아닌 척 외면하기

내 것이라 경험에 이름 붙이는 순간

유리파편 같은 끔찍한 상처들이 우박처럼 내리 꽂힌다.


신체손상으로 죽느니, 좀비로 사는 것을 택했다.


좀비는 감정도 이성도 없으니,

부유하면서

세속적 분위기와 명령하는 강자를 쫓는다.


이런 삶은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든다.

이해 할길 없는 영혼의 인간들은

오늘도 나하나 잘살기만을 기도한다.


역겨운 기도문을 찢고 싶지만,

과거의 좀비와 변해가는 인간 풍경들 속 섞여 들어가 있는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본다.


FUCK THE SCHOOL




* 메인 사진은 돼지의 왕이라는 만화 및 영화 제작 되었던 작품 캡쳐 사진입니다.

너무 어둡게 다뤘다는 평이 있지만, 학폭관련 내용을 잘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더 글로리>,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의 이름

가해자의 잘못을 용서할 수 없는데도, 지금의 내가 그저 간신히 살아남기 위해 표피적 용서를 택해왔던 수많은 나날. 그 비굴하고 수치스러운 과거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문동은의 철두철미한 복수의 시나리오, 강현남의 처절하지만 끝내 명랑한 순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체면을 버리고 미친 칼춤을 추는 망나니가 되어준 주여정, 자살의 위기에서 문동은을 구해준 에덴 빌라 주인 할머니의 따스한 미소다.

세상 누구도 날 구해주지 않는다고 믿었던 문동은은, 처절한 복수의 시나리오를 빠짐없이 실현하고 나서야 자신을 줄기차게 응원하던 낯선 타인의 친절이 자신을 구해주었음을 깨닫는다.


세상 모든 '동은이'들이여. 제발 포기하지 말고, 제발 홀로 슬퍼하지 말고, 부디 당신의 활짝 필 봄날을 응원해 줄 강현남을, 에덴빌라 집주인을, 칼춤까지 쳐줄 사랑스러운 망나니 주여정을 찾기를. 그리고 그 모두가 없을지라도, '나를 위해 칼춤을 쳐줄 나 자신'이 있음을 결코 잊지 말기를.




고통받고 있는 사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준다. 그것이 2차 트라우마를 부른다. 그 사람 착한 사람인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 그 말은 피해자의 가슴속에 얼마나 커다란 상처로 남았을까. 불법 촬영으로 직위 해제된 사람이 착한 사람인가?



- 정여울 작가의 '느끼는 법을 잊은 당신에게 <감수성 수업>' 중에서




가정도 친구도 어떤 것도 어떤 상황도 어떤 사람도 손 내밀어주지 않는 어둠 속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고 누구에게나 그것이 지금일 수도 있다.


무작정 이상적 환상만 꿈꾼 것은 아니지만 교사가 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내 손을 잡아준 수많은 사람들과 위기의 순간에 손 내밀어주신 고3 때 담임선생님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가 존재했다.


나의 삶, 가정, 나이 먹음, 귀찮음, 무뎌짐, 사람들의 시선 등 별의별 이유들이 내 거창한 이유를 녹슬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거창한 척하는 생각은 어딘가 다 바스러지지 않은 채로 웅크리고 있다.





난생처음 맡게 된 학생안전부 업무는 나를 좀비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다.

유리창에 비치는 내 모습은, 똑같이 좀비가 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사람들은 참 이상한 것 같다. 그러니 나도 사람이라 이상하겠지.

각종 매체에서 다루는 '슬프라고 보여주는 영상' '슬퍼야 한다, 애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뉴스'를 보면 눈물바다가 되고 가해자를 욕한다.


학교폭력도 마찬가지이다.

각종 매체의 '자 이제 피해자가 어떻게 힘든지 좀 봐봐' '자 가해자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지 이 모습을 좀 보라고!'라는 강박을 주는 현란한 드라마 대사와 영화 속 시각 효과는 대부분의 시청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권선징악이 실현되며, 정의사회라는 단어에 고개 끄덕이며 드라마와 영화 상영이 종료된다.


그 매체를 본 사람들 대부분도 정의사회 추구에 동의하며 눈물짓거나 공감하거나 댓글 달거나 선한 행동 실천에 여념이 없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우리 인생에서는, 공동체에서는 자막이 나오지도 않고, 메시지가 은연중에 각인되게 만들어져 있지도 않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알려주지 않으니 울어야 될 때 울지 않고 화내야 할 때 화내지 않는다.


고통을 받고 있어도 고통을 받는지 모르고, 폭력이 만연해도 좋은 걸 본 사람들처럼 화기애애함이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 치민다.







사람은 감정적이 되면 사건의 단면을 부각하여 생각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내 생각도 아마 업무과다 및 지나친 몰입으로 인한 부작용일 거라고 믿고 싶고, 믿고 있다.



공감은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껴야 하기 때문에,

내 삶과 내 마음과 내 신체를 잠시나마 타인에게 빌려주어야 한다.


내 마음이 가시밤송이처럼 변해버리면, 빌려줄 수 없다.

내 마음이 얼어붙었으면, 빌려주려다 깨지거나 녹아버려 사라진다.


각종 교권침해와 학교폭력, 모든 것이 다 폭력의 범주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어쩌다 모든 인간은 가시밤송이스럽게 돼 가는 걸까.

서로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는 낮과 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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