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의 역사
인생을 살다 보면
이게 네 운명이라고 말해주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확률적으로, 다 개새끼다.
- 이응준의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 <100퍼센트>
<환경 이동의 역사>
초등학교때 전학. 대학교때까지 총 5번의 거주지 이전. 초등학교- 고등학교 - 대학교 모두 다른 동네
고등학교는 전혀 다른 학군지에 선지원하여 사립학교로 갔는데, 실제로는 학비가 비싼 학교였지만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게도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존재하였으나 전통있는 사립학교라 부유한 친구들도 꽤 많이 다녔고 예산 많은 사립학교여서 학생으로서는 상당히 풍성한 문화를 향유할 수 있었다.(이루마 같은 유명 피아니스트를 초청하는 등의 예산이 필요한 행사가 많았음)
대학교도 거주지 이전을 했다. 고3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2학년 때까지 식비 무료 기숙사비 무료인 곳으로 진학하였다. (고3때 담임선생님은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한 분이다.)3학년때부터는 밥을 사먹어야 되지만 1000원에 한끼 먹을 수 있었다. 등록금 100만원쯤만 내는 국립대로 가느라 또 거주지를 이전했다. 등록금이 적어서 한학기 동안 각종 알바를 통해서도 학생들이 등록금을 나름대로 충당가능한 곳이었다. 과사 알바만 2개씩 했던듯(대학원에서도 하고 대학교 과사에서도 하면 2개 가능하다.)하다.
4학년에 본 임용고시를 떨어지고 재수를 했는데, 재수하는 동안 집중이수제라는(지금 사라짐)제도로 인해 2011년에 전국에서 윤리교사를 18명 뽑았다. 8명 뽑는 충청북도에 지원하여 생뚱맞게 처음 가보는 제천으로 또 거주지를 이전하게 되었다.
조금 더 도시화된 곳으로 가고 싶어서 4년뒤 청주 중심지 근처로 이전하였다.
청주 1년 근무 중 결혼이슈로 경기도에 도간 내신을 써서 또 이동하였다.
(* 혹시 도간내신 쓰고 싶은 분들은 도간내신 까페나 블로그 등 정보를 잘 수집해보세요. 갈까말까 하던 사람도 내가 올린 하나의 글로 인해, 상호교류 가능성을 보고 가는 것으로 확정지을 수도 있어요.)
10년 넘게 못가는 사람도 있다지만 로또 맞은 행운을 보여주며 경기도로 이전하였다.
왜이렇게 구구절절 이전의 역사를 이야기하느냐?
어떤 기사에서 보니 전학이 아이들에게 심리적 충격을 줄 수 있으니 잘 살펴보라는 글이 있었는데,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여기저기 돈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 지방 사람 수도권 사람 다 만나면서 환경을 자율 혹은 타율로 바꾸다 보니 '상황이 사람을 지배한다' 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나고 자라는 것이 마음의 평안함을 주는 것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군데 돌아다니면서 배운 것이 많아 감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환경이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생각을 주로 하고 지내는지 인식을 잘 못하거나 굳이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각종 이전의 경험 속에 느낀 것은 각자는 각자의 상황이 답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정말로 다 가지각색 다르다는 것이다. 지방은 지방만의 특색, 수도권은 수도권 만의 특색, 수도권도 그 안에서 빈부격차 및 문화권 차이에서 오는 차이 등등. 헌데 그들은 각자 자기들이 이 세상의 보편성이라고 믿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 무조건 처음에는 그 장소를 관통하고 있는 '믿음'과 '기준'이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집중하고, 말하기보다는 주로 들었다.
혹시라도 잦은 이전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었다면, 한번쯤은 고려해도 좋을 듯 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편성이라고 믿고 있는 행동, 말, 모습을 보이는 것을 선호하고 호감을 나타낸다.
물론 모든 것을 뛰어넘을만큼의 호감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경우는 장소를 관통하는 기준을 굳이 면밀히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추가적인 생각이다.
그 공간의 보편에 맞추어 행동하기 어렵다면, 익숙해질때까지는 경계인 정도로 머무르면서 그들이 하는 행동 눈빛 표현들을 관찰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쯤에는 자연스럽게 적응되고 그냥 여기서 잘먹고 잘살자 정도로 열심히 지내게 됬다. 하다보면 점차 여기가 정말 좋아로 귀결된다.
하지만 각 공간에서의 적응의 과정은 정말 피토하게 힘들었다. 사람들마다 왜이렇게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지, 신물날지경이었다. 나이가 들고 무뎌지면서 나아지는 부분도 있고, 공간을 이동해도 점점 애써 적응하고 생존할 필요없는 나의 공간들, 내가 원하는 인간관계만 유지하는 등의 행동들이 늘어나면서 훨씬 삶이 편해지기는 했다.
물론 각자 추구하는 보편이 다르다해버리니 마치 아무것도 정답이 없는 삶처럼 느껴지는 표현같기도 하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는 다르지 않다. 다만 호감과 비호감을 가르는 요소가 미묘하게 다르고 옳다고 누적하는 행동들이 미묘하게 달라서 생활방식이 다르고 문제의 해결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헌데 그 다름이 대부분 차별이나 배척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나서서 곤란함을 겪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피하고자 노력했었을 뿐이다.
이동하면서 분명 상황이 사람을 만들고,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나조차 내 삶의 사고방식이 맞다고 무조건 맞을거라고 마음 먹는 듯 하다. 나와 다른 사고방식의 사람들을 자꾸만 배척하고 내 말이 옳다고 우기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올라오니 말이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사람은 참으로 아는것만 실천해도 이세상에 이런 대단한 성인군자들이 없을 듯하다.
조금 더 관용할 줄 아는 내가 되고 싶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은 생각, 따뜻한 생각을 하는 내가 되고 싶다.
누군가 애써 나의 기준이 맞다고 억지로 맞장구쳐주지 않아도 나와 잘 지낼 수 없는 둥근 내가 되고 싶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을 때. 그의 곁에 그의 제자들이 하나도 없었음을 우리는 자꾸 잊는다.
이것 하나만 잊지 않고 살아도 우리는 많은 어둠을 피해갈 수 있고 또 스스로 어둠이 되지 않을 수 있다.
- 이응준의 작가는 어떻게 생각을 시작하는가 <이것>
내 기준이 옳아도 사람들은 나와 함께 가지 않을 수 있다. 누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내 곁에 함께 하고 나와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원망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