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러한 것, 自然

갈라파고스. 천혜의 자연: Bahía Sardina, 그리고 조화

by 노마드

22. 12. 22: Day 7,


배는 Bahia Sardina 해변에 정박했다. 마지막 목적지인 Kicker Rock 바위 전에 잠시 들러가는 해변이었다.


가이드, 파보를 뒤따라 물로 첨벙 뛰어들었다. 운동화는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있었고,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까슬거리기는 했으나 시원한 물에 몸을 맡기자 이내 모래알들이 씻겨져 나갔다. 배에서 모래사장까지의 짧은 거리를 반쯤 서 있는 어정쩡한 모양새로 헤엄쳐 갔다.


가장 먼저 뛰어들었음에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바다거북의 사진도 찍고, 스노클링 장비를 동여맨 채 물고기들을 관찰하며 움직였기에 마지막에 뭍을 밟았다. 땅으로 올라와 보니 영수증으로 추정되는 잉크 빠진 종이들이 굴러다니고 있어 주운 후 대충 스노클링 장비 가방에 갈무리했다.


이미 여행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해변에 드러눕거나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스노클링을 즐기고 있었고, 나 역시 그 행렬에 참여하려던 찰나 파보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갔더니 파보는 내게 감사를 표하며, 이 해변이 스노클링을 하기에도 좋지만 걸어 다니며 다양한 장소를 탐방해 보는 것도 괜찮다는 조언을 건넸다.


여행지에서 현지인의 추천만큼 (말은 가끔 믿을 게 못 된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없기에 사람들을 뒤로하고 조금 더 깊숙이 해변을 탐방했다.


모래를 보듬고 물러가는 잔잔한 파도 소리만이 조그마하게 퍼져 나가는 평화롭고 고아한 곳이었다. 바람과 모래가 빚어낸 사구 아래로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바다를 보며 걷다 문득 고개를 돌리니 파란 하늘 아래 이름 모를 붉은 풀들이 사운거리고 있었다.


<강렬한 레드>


다시 걷기를 몇 분, 좌측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나 돌아봤더니 팰리컨 한 마리가 허공을 맴돌다가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펠리컨의 사냥>


어떻게 저 높이에서 물속을 속속들이 내다보고 먹이를 찾아내는지 신기했고, 그 역동적인 생존의 행태가 경이로웠다. 어릴 적 동생과 침대에 기대앉아 저녁이면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녀석들은 사람을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지 가까이 다가가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내게 3m 거리에서의 촬영을 허락해 줬다.


20여 분 정도 팰리컨을 관찰했을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아 황급히 미팅 포인트로 돌아갔다. 여전히 사람들이 머리를 물속에 묻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간은 넉넉히 남은 듯했고 이번에는 사구를 넘어 거북이 산란지로 알려진 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찬가지로 파보가 알려준 포인트였다.


팰리컨이 먹고 남은 게딱지들이 흩뿌려져 있어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은 백사장과 달리 언덕의 모래 입자들은 잘고 가늘었다. 그러나 동시에 뜨겁기도 했다. 무시한 채 내려가려다 도무지 모래의 열기를 견딜 수 없어 신발을 신고 언덕을 넘었다.


내리막까지, 그리고 바위 건너편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만들어진 좁은 길이 있었지만, 그 중간의 바위들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어 딛고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최대한 풀들을 밟지 않으며 우회할 생각도 했지만, 발이 푹푹 땅으로 꺼지는 것을 보고 포기했다. 신발을 벗어 밑창이 찢어질 것 같은지 바위에 몇 번 긁어본 후 잽싸게 바위 위를 가로질렀다. (고통은 발이 닿는 시간에 비례하기에 무작정 뛰었다. 보이는 것과 달리 아무렇지 않았다.)


< 자연 속에 녹아드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


모래 언덕이 외부의 바람과 소리를 막아내 비현실적으로 고요한 장소였다.


새들의 걸음걸이에 맞춰 뭍과 물이 서로를 보듬었고,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서 있노라면 힘차게 맥동하는 내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새들이 찰박이면 구름이 일렁였고, 상이 어그러졌다 모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중국 장가계와 스위스 아이거 북벽 등 자연이 빚어낸 걸작들 앞에서 수없이 압도되고, 도전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이질적인 대자연의 위엄을 수차례 느꼈던 나였지만, 이 습지는 그저 그러한 것이 自然이자 조화라고 속삭이며 안온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되려 창백한 푸른 점 위에서 내 위치를 짚어내 주었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을 통해 "지루하다고 말하는 현상은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시간의 병적인 단축현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매일이 같다면, 그 모든 나날이 하루와 같다는 것,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죽어버리거나 희미해지는 것이라고 선언한 그의 말대로 나는 하루 같은 수년에 질려 버렸고, 끝없고 끝없을 반복의 고리 속에서 불쑥 솟아 나오려는 긍정의 새싹들을 밟아 죽여왔다.


행복은 고생과 양립할 수 없는, 아니, 결코 양립하지 말아야 할 무엇이라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보통 내게 일상 속의 행복은 후회 섞인 뒤늦은 깨달음의 형태로 찾아온다. "그때 참 행복했었는데.", "돌이켜보면 힘들어도 참 좋았지."의 형태로... 순간순간을 즐기는 방법을 아직 온전히 찾아내지 못했기에, 우울한 나날들 속에서 그래도 살아볼 만한 구석을 찾아냈노라며 차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에 인색했다.


그러나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여행에서는 별달리 특별할 것이 없는 순간에도 불현듯 내가 살아 있음을, '그저 그러한' 대로 살아 있어 행복함을 명징하게 관조하게 된다.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간만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내뱉지 못했던 말을, 툭 내뱉었다.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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