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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Jan 18. 2018

삶은 계란이다.

밤에 계란을 삶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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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계란을 삶는 일


밤에 계란을 삶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 밤에 무슨 계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삶은 계란, 그 이야기다.


냄비에 물을 넣는다. 가스불을 켠다. 소금과 식초를 떨어뜨린다. 소금은 한 소큼, 두 소큼 느낌적인 느낌으로. 식초도 쭈우욱.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낸다. 소금과 식초가 들어간 끓는 물에 계란을 넣는다. 소금과 식초는 계란 껍질을 쉽게 깔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다. 과학적인 원리는, 글쎄. 나는 그저 계란을 쉽게 까고 싶을 뿐.


잠시 한 눈을 팔다가 냄비 앞으로 간다. 불을 끈다. 뜨거운 물을 버린다. 차가운 물을 넣는다.  연기가 올라온다. 삶은 계란이다.


껍질을 두드린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앞, 옆, 위, 그리고 아래까지 골고루 두드려준 껍질을 두 손 안에서 빙구르르 돌린다. 너무 세게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너무 약하게 해서도 안된다. 적절한 힘조절이 필요한 시점. 약간의 껍질을 뜯어낸다. 틈이 생긴다. 이 틈의 양쪽으로 껍질을 벌린다. 너무 세면 계란이 뭉개진다. 너무 약하면 힘없이 껍질 부스러기만 생긴다. 껍질을 다 까면 나오는 흰자, 삶은 계란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라는 데미안 속 한 구절을 빌리자면 내 삶은 계란도 하나의 세계다. 그냥 계란이 아니라 삶은 계란이니 하는 소리다.


이 밤에 계란을 삶는 일이란, 게으른 내가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간편한 아침 준비이다. 밤에 계란을 삶은 다음 날 아침이면 깨어난다. 삶은 계란을 챙겨 밖을 나선다. 하루가 시작된다. 삶은 계란이다.


며칠동안 계란을 삶지 않았다. 며칠동안 아침에 깨어나지 못했다. 아니, 깨어나지 않은걸까.


삶은 계란이다. 이 밤에 계란을 삶은 날이면 어김없이 아침에 깨어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알은 곧 세계이다. 어쩌면 헤르만 헤세도 계란을 삶다가 데미안을 썼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냥 계란이 아니라, 삶은 계란이니 하는 소리다. <삶은 계란>


에라이세이_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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