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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Nov 09. 2019

십 만원 버스 / 에라이

흔히들 말한다. 출퇴근 버스에서 '퇴사뽐뿌'가 온다고, 세상 '인류애'가 모두 사라진다고. 좁디 좁은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이리도 한꺼번에 몰려 타는 것이 말이 되냐고. 같은 돈을 내면서도 언제는 넉넉한 이 버스가, 출퇴근 시간에는 프라이빗존을 침범한 남의 입김을 가득 마시면서 목적지를 향해야 하는 불쾌한 버스가 되는 것이냐고.


그러게나 말이다. 언제까지 이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 것인지 한숨을 내쉬면, 그 한숨은 바로 앞 사람의 피부에 가닿아 불쾌한 입김이 될 터였다. 그런 와중에도 정류장마다 새로운 사람들은 문 위의 벽을 손으로 밀치면서 엉덩이를 들이민다. 기사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는 듯이 차 문을 열었다 닫는다. 1인당 쓸 수 있는 공간이 더 좁아질수록, 빽빽해지는 버스의 사람들이 불쾌해질수록 버스는 돈을 더 벌어 들인다. 그렇게 버스가 가득차면, 우리는 이 버스를 '만원 버스'라고 부른다.


만원 버스? 언제부터 우리는 사람들이 가득찬 버스를 만원 버스라고 불렀을까? 족히 몇 십 년은 되었을 것 같은 이 표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버스 요금은 올랐으면서 이 표현만큼은 그대로다. 이만큼 사람들이 가득 찼으면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요금을 다 더하면 넉넉히 잡아 십 만원은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만원 버스'다.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 이름이 고정된 만원 버스는, 그것이 대중교통인 탓에 밀려드는 대중을 막지 못한다. 출구와 입구를 가리지 않고 밀려 드는 승객 탓에 이미 타고 있던 승객은 내려야 할 곳을 쉽게 내리지도 못한다. 이런 불편함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대중의 영역을 벗어나 프리미엄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 곳에서는 프라이빗한 공간을 지킬 수 있다. 가령 택시나 자가용을 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여유가 없는 대중이지 않은가. 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만원 버스에 몸을 싣는다. 이런 현실에 적응한 대중은 그 좁은 공간에서도 사적인 업무를 처리해낸다. 스마트폰 화면을 끝까지 사수하면서 게임을 하고, 전화를 한다. 책을 읽는가 하면, 무언가 노트에 끄적이기도 한다. 아직 만원 버스에서 곡예를 벌일 수준이 되지 못하는 나는 짐을 지키며 내려야 할 출입구를 바라보기에 바쁘다. 그러다 언젠가는 나도 그들처럼 만원 버스에서 다른 업무를 볼 터였다. 사람은 가득하지만 그들은 같은 방향으로, 같은 시간에 향하는 것 외에는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무신경하다. 사람들이 모이는 요즘의 광장이 다 그렇지 않은가. 하여 만원 버스는 오늘도 무리 없이 갈 길을 간다. 답답한 이 공간 속에서 생긴 체증을 가라 앉히는 것은 이 차를 벗어나는 순간에서야 가능하다. 음-파. 탁 트이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어쩔 수 없이 다시 사람들이 가득한 움직이는 광장에 몸을 싣는다. 씹...... 만원 버스다.


by. 에라이 / 10월 1주차에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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