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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한 편,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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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중효 Aug 31. 2022

기일의 기억

생일 (2019)


 순남(전도연)의 집에는 매일같이 드럼세탁기가 돌아간다.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인 순남은 4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아들 수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버거운 듯하다. 그녀가 수호를 생각할 때마다 영화는 세탁기를 보여준다. 일반세탁기와 달리, 드럼세탁기는 창 너머로 빨래가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용하게 돌아가는 세탁기에 시선이 머물 때마다, 마치 물속에서 꺼내 달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들 수호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순남은 매일같이 죄책감에 시달리며 조용한 비명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태아가 엄마의 뱃속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작은 원에서 시작된 생명은 점차 손과 발이 생기고, 손가락 안에는 그의 고유함을 담은 지문이 새겨진다. 이어서 성별이 결정되는데, 그(녀)는 이미 식욕과 성욕을 지니고 있으며, 서서히 ‘취향’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내향성과 외향성, 인내심과 유머 감각 등 우리가 ‘성격’이라 부르는 것 역시 이 시기에 형성된다고 한다. 태아의 10개월 동안의 짧은 생(生)은 그의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될 만큼 경이로운 순간의 연속이다.


 인생으로 치자면 노년기 즈음에 태아의 신체는 완성된다. 이 정도면 ‘잘 살았다’라고 생각할 때쯤, 아기는 ‘엄마의 바다’에서 나와 공기와 빛이 가득한 세상으로 온다. 드디어 그(녀)는 태어난 것이다! 이 날은 태아의 입장에서 보면 ‘생일’이 아니라 ‘기일’ 인지도 모른다. 태아로써의 짧지만 안락했던 삶이 끝나고, 이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인생이 열리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과 삶은 이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순남은 수호의 생일을 기념하자고 말하는 이들의 제안을 모두 거절한다. 아직 그의 기일조차 충분히 애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수호의 생일을 기억하는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일을 태어난 단 하루로 생각하는데, 사실 이 영화에서 생일은 살아있는 모든 날들을 말하는 것 같다. 수호의 삶의 작은 조각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지인들의 말이 오고 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순남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한 응어리도 서서히 풀리는 것 같다. 그 순간 그의 딸 예솔(김보민)이 그에게 물 한잔을 건네고 그녀가 물컵을 건네받는다. 남편 정일(설경구)이 건넨 물컵을 패대기쳤던 과거와 다른 모습이다. 이 장면은 더 이상 그녀의 가족들이 물을 무서워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감독의 말이었을까. 동시대를 살아가는 슬픔의 목격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 역시 그들의 삶에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지길 간절하게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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