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박지후)의 가방 끈에 적혀있는 문구이다. 특유의 원색 톤으로 기억되는 브랜드 베네통은 1982년부터 2000년 사이 이탈리아의 사진작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와 손잡고 도발적인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신부와 수녀가 키스하는 사진, 흑인 여성이 백인 아기에게 모유 수유를 하는 사진, 보스니아 내전에서 총을 맞고 숨진 병사의 옷을 찍은 사진 등 정치, 종교는 물론 전쟁과 인종 차별 문제 등 베네통은 말 그대로 성역(聖域) 없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은희의 가방끈에 적힌 문구는 바로 사회적 금기를 다룬 이 파격적인 캠페인의 슬로건이다.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90년대 중후반은 이 캠페인이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시기이기도 하다. 90년대 후반 베네통은 소송 문제로 캠페인을 중단하게 되고 토스카니와도 결별하게 된다.
초록색 직사각형 모양의 베네통 로고는 은희가 다니는 한자 학원의 초록색 칠판과 닮았다. 은희가 사랑한 한자 선생님 영지(김새벽)는 칠판 위에 흰 분필로 또박또박 글씨를 채운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相識滿天下 知心能機人).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까지 아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아마도 김보라 감독은 은희의 가방끈에 숨겨두었던 말을 칠판 위에 대놓고 새겨 놓은 듯하다. 결국, 영화는 너무나도 다른 색을 가진 각각의 존재들이 진정으로 소통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인지 그 가능성을 여러 차례 되묻고 있다.
<벌새>에는 두 번의 기이한 울음이 나온다. 첫 번째 울음은 은희 아버지(정인기)의 울음이고, 두 번째 울음은 은희의 오빠 대훈(손상연)의 울음이다. 은희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의 모습으로 영화 내내 아내와 자식들 위에 군림한다. 은희의 어머니는 참다못해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을 보여주곤 하지만 대부분의 일상은 ‘붙박이장’처럼 가부장 중심의 가족 내 질서에 군말이 없다. 은희를 경찰서에 넘기겠다는 전화를 받고도 미동이 없던 아버지는 은희가 위험한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말에 느닷없이 눈물을 터뜨린다. 은희의 오빠 대훈은 아버지보다 직접적으로 은희에게 피해를 주는 가족 구성원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화가 나면 은희를 때리는 대훈의 모습은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그가 심각한 결함을 가진 인간임을 말해준다. 여동생에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일삼는 그는 은희의 언니가 성수대교 붕괴사고 당일, 사고 없이 집에 무사히 돌아오자 끝내 눈물을 보인다.
악(惡)이라는 글자의 한자를 해체해 보면, ‘억누를 아(亞)’ 와 ‘마음 심(心)’ 두 글자로 분리된다. 말 그대로 악의 어원은 ‘마음을 억누른다’는 뜻과 다름없다. 그 억누름의 대상이 스스로에게 향한다면 그는 악인이 될 것이고, 타인을 향한다면 그것은 폭력이 될 것이다. <벌새>는 억눌린 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는 은희의 필사적인 발버둥으로 보인다. 그것을 이겨낸다면 은희는 벌새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글 임중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