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동 성당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미용실에서 나와 다시 카메라를 들고 다른 골목길로 향해 걸어갔다. 미용실에서 나오자마자 건너편에 위치한 한방병원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길이 있는데, 그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빌라와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잠시 발자국을 움직여 고개를 내밀고 골목길의 상태를 사진으로 담아보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막상 골목길에 들어서니 이곳도 우리 아파트 앞 상황하고 다를 바가 없었다. 빨간색 락가로 크게 적어진 '퇴거'문구와 '철거', '철거예정'문구. 초록색으로 칠해진 주택 대문은 출입금지 테이프로 굳게 잠겨져 있었고 그 위에는 '퇴거'라고 적혀 있었다.
'아.. 이제 진짜 동네 사람들은 전부 다 이사를 가버렸구나..'
한 발자국씩 움직이며 골목길에 쌓인 가구들을 보고 있었던 순간 나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잠시 추억 속으로 빠지게 하는 물건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님이 거실에서 사용하시던 청소기와 같은 모델, 테이프를 직접 넣어서 재생 버튼을 눌러야 음악이 나오는 오디오, 세월의 흔적이 묻어 흰색과 노란색의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있는 냉장고까지... 작은 골목길이지만, 동네에서 살아온 시간과 흔적을 보여주는 물건들이었다. 놓여져 있는 위치만 바뀌었을뿐 길가에 놓여 있는 가구들과 오래된 전자기기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물건들을 버리고 갈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단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니 이참에 다 버리고 새로운 가구와 물건들로 장만을 한다는 기대감과 동시에 손을 많이 탔던 물건들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아쉬움도 공존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 문밖에 버리고 동네를 떠날 때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해 본다. 그래도 사진으로 동네의 마지막 순간을 담고 있을 때 자주 봐왔던 강렬한 빨간색 락카칠과 '퇴거', '철거예정' 문구만 보다가 이렇게 잠시 추억으로 돌아갈 수 있는 물건들을 구경하다 보니 지난날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항상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케이크집과 떡집, 돌계단을 올라가야 들어갈 수 있는 주택처럼 보이는 작은 카페, 이모와 성당 사람들이 자주 다니던 피자집. 그리고 무엇을 전시하는지 알 수 없었던 작은 갤러리와 내가 자주 다니던 미용실까지. 불과 왕복 2차선 길 하나 차이로 재개발 구역이 정해졌고, 이 길로 인하여 바뀌어버린 산수동 주민들과 상인들의 운명.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이리저리 골목길을 돌아다니던 중 골목길 맞은편에서 2명의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사실 내가 미용실에서 나와 사진을 찍을 때부터 계속해서 나를 예의주시하며 쳐다봤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합에서 나왔어요?"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나의 대답을 들은 두 명의 중년의 남성은 표정이 변하면서 나에게 조금 억양 된 톤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카메라를 들고 여기를 사진 찍는 겁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차마 모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에 살았던 주민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재개발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진하게 묻어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담긴 장소입니다.. 그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보고자 했고 앞으로도 담을 예정입니다."
내 말을 들은 중년의 남성 두 명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이 몰고 온 차로 다시 돌아가 이 동네에서 빠져나갔다. 과연 이들은 나에게 무슨 불만이 있었던 건지 시동을 걸고 출발하면서 창문을 내리고 나를 쳐다보며 크락션을 쎄게 3번씩이나 울리며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