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2022(수정)
(게으른 작가의 글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겠소...)
누군가는 마녀의 무도회라고 했다. 그 비밀스러운 무도회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 귀족도, 어느 왕족도. 가시가 돋친 장미의 인장이 찍힌, 보라색 밀랍으로 봉인된 초대장을 받은 자만이 그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곳엔 지상의 그 어떤 귀한 음식이나 술도 마음껏 즐길 수가 있었다. 평생에 한 번이라도 그곳에 초대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성 안팎으로 넘쳐날 정도였고,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은 노래처럼 퍼져나갔다.
마녀는 자신이 내린 저주에 걸린 이를 지켜보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그 대상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더.
마침내 그 대상이 저주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삶을 살게 되는 순간, 그때의 기쁨을 위해 십수 년째 무도회를 연다고 했다.
모두는 자신이 그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꿈꾸며 무도회를 찾았다. 모두 비극이 아니라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될 거라고 꿈꾸며. 바로 오늘이 그 밤이었다. 커다란 원형 홀 안에 감미로운 연주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수많은 귀족들은 화려하게 빛나는 드레스와 매끈한 예복을 입고 자신을 뽐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넓은 공간엔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귀족 커플들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과는 이질적인, 한 아름다운 여인이 사람들과 동떨어져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훤칠한 키, 허리까지 내려오는 짙고 곧은 금발 머리카락과, 조각난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한낮의 백사장처럼 흰 피부를 가진 여인이.
아름다워라…라고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은 옆에 있는 사람들의 귀띔을 듣고는 슬그머니 그녀를 피했다.
저주를 받아 눈이 먼 공주.
그 말은 점점 이상하게 와전되어 저주받은 불쌍한 그녀도 이젠 한 명의 마녀가 되어있었다. 눈이 멀어 사람들을 이유 없이 증오한다는.
‘마녀의 무도회?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주 조금. 와인은 미지근했다. 처음엔 차가웠으나, 그녀가 마시지 않고 들고만 있었기 때문에 점점 그녀의 체온으로 데워져 버린 것이었다.
‘메리안도 보냈으니, 나에게 말을 걸어줄 사람은 없겠지.’
그녀는 자신의 시녀를 생각하며 씁쓸히 웃었다. 당황하며 사양하는 메리안에게 오늘 하루쯤은 무도회를 즐기라고, 웃으며 반협박으로 저 안으로 보냈다. 드레스는 자신의 것을 입혀주었고, 메리안을 위해 몇몇 이들에게 손도 써놓았다.
메리안은 지금쯤 어딘가에서 어느 귀족 청년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메리안의 외모는 시녀 중에서도 손에 꼽혔다. 교양 또한 빠지지 않았다. 심심하지 않게 그녀의 옆을 지켜줄 친구로 두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메리안마저 없이, 그녀는 우두커니 울려 퍼지는 음악을 들으며 서 있었다.
‘심심하네… 누군가 대화라도 나누었으면 좋겠는데.’
…
샹들리에 위에서 타오르는 초의 불빛이, 수백 갈래로 뻗어 그 아래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 표정 속의 욕망은, 품위라는 가면 뒤에 숨어 언제 그 이빨을 드러내야 하는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그 어떤 달콤한 말이 오가든, 얼마나 향긋한 향기가 풍기든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던 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도회장의 저쪽에서, 멍하니 서 있는 한 여성을 보고 입가에 조용히 미소를 띠었다.
‘아름답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가 지나간 뒤엔 그에게로 향하는 시선이 여기저기서 날아와 꽂혔다. 그 시선의 주인은 꽃이 핀 듯 화려하게 치장한 귀부인들. 하지만, 그녀들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귀족 중엔 소문난 바람둥이였기에.
그는 금색 실로 소매에 자수가 놓인 예복을 입고 있었다. 꽤 어두운 분위기였으나, 그 옷 주인의 외모와 딱 들어맞았다. 차갑지만 어딘가 매혹적인 남색 눈동자와 수려한 용모, 게다가 그는 검은 머리칼이 어디서든 눈에 띄는 이국적인 혈통을 갖고 있었다.
“함께 춤추시겠습니까, 레이디.”
그는 한 여성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상체를 숙이며 정중하게 물었다. 이 한 동작만 수백 번을 연습했다고 해도 믿어줄 만큼, 우아한 동작이었다.
“실례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녀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도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다시 물었다.
“그 안타까운 대답에 대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저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그는 자세를 바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의 경솔함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예, 그 사과를 받아들이죠.”
그녀는 무표정하게 대답했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실례지만, 저는 그럼 제 눈앞에 계신 이 아름다운 숙녀분께 무엇을 요청할 수 있습니까?”
그는 여유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자는 것이나, 함께 대화하자는 정도겠죠. 하지만 전 이미 술을 마시고 있고, 당신과 함께 대화하고 있으니 더 이상 저에게 요청하실만한 건 마땅히 없군요.”
“아, 그런가요?”
그는 계속 미소 지으며 그녀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그녀가 먼저 그에게 물었다.
“귀하의 질문에 답했으니 저도 귀하께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귀하는 칼스 베르엠 님이 아니신가요. 흑발의 왕자라고 불리시는.”
“아, 정답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베르엠님이 지나가시면 순간적으로 귀부인들의 대화가 멈춘다고 하던데, 정말이군요.”
“그렇습니까? 하하, 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가 웃음을 그치자, 그녀가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 실례지만 한마디 드려도 될까요?”
칼스는 가볍게,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아뇨. 저도 한 번 정도 거절하고 싶은데요.”
보통 사람 같으면 불쾌감이 표정에 드러날 법한 가볍고 장난스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그녀는 옅게 웃었다.
“왜죠?”
“글쎄요.”
칼스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경계를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없다는 듯이 곧장 말했다.
“그럼 혼잣말로 하죠. 난 아무에게나 웃어주는 바람둥이가 싫어.”
“하하하!”
칼스는 크게 웃었다. 그 때문에 시선이 조금 집중됐으나, 곧 시선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이 왕자와 공주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웃음을 그치고, 아까부터 가만히 서서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아름다운 금발의 미녀에게 다시금 말을 걸었다.
“짧고 명쾌하군요.”
칼스는 질리지 않는 장난감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계속 웃고만 있었다. 그런데 순간,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 훗.”
그건 그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기에 표정이 약간 굳어진 칼스에게 돌연 그녀의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당신이 무슨 생각인지는 다 알아. 칼스 베르엠, 흑발의 왕자. 혼자 쓸쓸히 있는 여자를 보자 탐이 났겠지. 굶주린 맹수가 길 잃은 사냥감을 보듯 말야. 그래, 하지만 설령 내가 아니라고 해도 당신은 다가왔을 거잖아? 그리고 똑같이 웃어주겠지. 지금까지 당신이 만난 모든 여자를 그런 식으로 가지고 놀았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런 장난질에 놀아날 만큼 평범하고 어리숙한 바보가 아냐.”
칼스는 그녀의 눈동자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초점 없이 흐린 그녀의 눈동자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했다.
“무례하군.”
“상관없어. 당신은 아직 나를 모르나 본데, 나는 당신을 알아.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저주받은 왕자. 칼스 베르엠.”
칼스는 흠칫 놀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당신이 레이린 티에르… 그 눈이 먼 공주인가? 훗… 뭐, 한 번쯤 만나고는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된다니 뜻밖인걸.”
“느낌이 어때?”
이 둘의 대화는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아름다워. 그리고, 왠지 모를 동질감도 느껴지는군. 그래, 저기 있는 멍청한 여자들과는 확실히 달라. 낯설고 신비해… 제길, 왜 좀 더 빨리 만나지 못했을까? 그 차갑고 흐린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날 애타게 찾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좋겠어, 정말로.”
칼스는 감탄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소리 죽여 웃었고, 레이린은 그 웃음소리에 양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변태자식.”
“아,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 음흉한 짓은 하지 않아. 상대방이 날 사랑하게 만들고는, 그 상대가 날 너무나 원하게 되었을 때 비참하게 갖다 버릴 뿐이지.”
“어차피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짓은 저기 가슴 풍만한 귀부인들에게나 예의 바르게 부탁해 보시지.”
“호오… 어디 그런 귀부인이 있나? 아참, 당신은 보지도 못하잖아.”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뒤쪽에서 춤추고 대화하는 귀부인들을 둘러보다가 하 웃으며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냄새로 알지.”
그녀는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살짝 젖혔다. 하지만, 이번엔 술은 마시지 않았다. 입술만 적셔서 마시는 척만 했을 뿐. 자신이 취한 상태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이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린 줄 알 것이고, 그러면 그의 방심을 틈타 좀 더 쉽게 그를 짓눌러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신기한데. 그래서 그 와인도 향기만으로 알 수 있나? 품종이라던가?”
레이린은 약간 멈칫하다가 천천히 입에서 술잔을 떼었다.
“… 후, 과연. 연기는 안 통하네.”
그녀는 자기 생각이 쉽게 간파되자 가볍게 웃으며 고고한 손동작으로 술잔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들려오는 목소리의 방향만으로 정확히 그와 마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은 크게, 또박또박하고 다소곳이 말했다.
“무겁군요. 실례지만, 테이블에 놓아주시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미소 지으며 정중하게 술잔을 받아 들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물론입니다. 레이디.”
잠깐의 휴전. 둘은 찰나의 순간, 불꽃이 튈 만큼 머리를 굴렸다. 상대방을 꺾어버릴 방법을. 그런데 그때, 지금까지 연주되던 조용하고 느린 음악이 끝나고 경쾌한 춤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둘의 귀가 쫑긋했다.
… 그리하여, 둘이 내린 결론은…
이번엔, 레이린이 칼스에게 제의했다. 무릎을 조금 굽히면서, 드레스를 옆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함께, 춤추시겠습니까. 베르엠 왕자님.”
칼스는 그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답하며 고개 숙여 그녀의 청을 받아들였다.
“물론, 영광입니다. 티에르 공주님.”
레이린이 살짝 오른손을 내밀었고, 칼스는 그 손을 부드럽게 쥐고 고개를 들며 낮게 속삭였다.
“자신 있나? 보이지도 않을 텐데.”
그녀는 지금까지의 대화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역시 조그맣게.
“물론. 그렇다면, 이건 어때? 먼저 상대방의 발을 밟는 사람은 상대방의 노예가 되는 것.”
“괜찮군.”
둘은 무도회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저주로 인해 눈이 멀어, 사람들과 쉽게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공주.
저주로 인해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모두를 증오하고 이용하는 왕자.
그 둘의 조용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저주를 푸는 방법이
함께 춤을 추는 것이라는 걸
알고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