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이스 임은정 Sep 05. 2020

스물다섯에 결혼하게 될 줄이야

결혼도 최초

"결혼할 거면 지금 해라. 아빠 회사 옮기기 전에."


갑자기 아빠가 결혼 얘기를 꺼내실 줄은 몰랐다. 전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엔 나 자신을 어리다고 생각했고 결혼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근무지가 다른 곳으로 발령 나기 전에 결혼해야 하객들도 많이 올 수 있고 축의금도 많이 받을 수 있으니 이왕 결혼할 거 지금 하는 게 좋다는 아빠의 말씀을 듣고, 그때 처음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 당시에 친구들은 대부분 회사에 다니거나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고 결혼 얘기가 나오는 때가 아니었다.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결혼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스튜디오 촬영 장소도 고르고, 드레스도 고르고, 들러리 촬영할 친구들 드레스도 고르고, 한복을 고르고, 메이크업받을 미용실도 고르고, 예물을 고르고, 뒤풀이 장소도 고르고, 신혼여행지도 고르고... 고를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결혼 준비하면서 너무 신나고 설렜다. 양가에서는 결혼식 준비하는 과정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으셨고, 전남편은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 단 한 번의 마찰도 없었다.


우리는 그때 해외에 있다가 결혼식 때문에 한국에 잠시 와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모든 준비와 결혼식을 마쳐야 했다. 살면서 부럽다는 말을 그때 제일 많이 들어 본 것 같다. 나만의 세상에서 주인공으로 사는 기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의 목표 같은 건 없었다. 결혼식을 얼마나 멋지게 할지, 어떻게 하면 재밌게 할 수 있을지 그저 그것만이 최대 관심사였다. 목표 없는 삶이 어떻게 날 이끌게 될지 모른 채 그 순간에만 심취해 있었다.


인생의 가장 큰 파티가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터로 복귀했고, 이전의 일상과 다를 바 없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쁜 드레스를 입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생애 처음으로 호화스러운 신혼여행도 즐겼는데, 이제 주인공 놀이는 끝났다. 전남편을 따라 외국에서 살아야 했기에 친구도 가족도 이젠 곁에 없었다. 큰 공허함이 몰려왔다. 이 공허함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하루종일 멍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집에서도 울고 일하면서도 울었다. 아무것도 기쁘지 않았다. 친구들한테는 이런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가끔 친구들에게서 전화가 올 때면 밝은 척했다. 외국에 있으니까 시댁 스트레스 없고 좋겠다며 부러움을 샀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작은 형님과 큰 형님이 있었는데 두 분 다 시댁에 엄청나게 잘했다. 애교도 많고 싹싹했고 나랑은 정반대였다. 시댁 어른들은 정말 잘해주셨지만 어른이 불편한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너무 어려웠다. 작은 형님은 시댁에 틈만 나면 전화를 했다. 요리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시어머니께 전화해서 물어보고 정말 친정엄마 대하듯이 했다. 형님들이랑 비교될 것 같아서 나도 잘해야겠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성격상 매일 전화하는 건 못할 것 같고 그래도 보름에 한 번씩은 전화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달력에 표시해뒀다. 그런데 그 날짜가 다가올수록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할 말을 종이에 적어둘 정도였다. 전화하는 당일이 되면 한국에 무슨 사건·사고가 없나 검색해 보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서 전화했다. 전화하는 게 무슨 어려운 일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어른을 너무 어려워했던 내게는 줄담배 피울 정도로 스트레스받는 일이었다. 전남편은 우리 집에 자주 안부 전화를 했었는데 난 그게 부담스러웠다. 그만큼 나도 시댁에 전화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참 별거 아닌데 그때는 그게 왜 그리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가 시작됐던 것 같다. 형님들과 비교하면서, 요리도 못하고 어른들에게 싹싹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며 미워하기 시작했다. 전남편이나 시부모님이 아무리 괜찮다고 얘기해도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큰 공허함이라는 파도와 자책이라는 비바람과 미움이라는 우박이 나를 사정없이 쳤다. 우울증이 뭔지도 모르고 살던 내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예레미야 4:23 새번역


I looked at the earth, and it was formless and empty; and at the heavens, and their light was gone.

Jeremiah 4:23 NIV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