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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임은정 Sep 11. 2020

스물일곱에 학교 다닐 줄이야

계획에 없던 완벽한 계획

외국에서 생활해보고 싶어서 휴학했었다. 원래는 1년만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남은 학기를 마치는 게 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외국에서 전남편을 만나서 어쩌다가 결혼까지 하게 됐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남은 학기를 마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는 누군가의 아내도 아니었고 앞으로 한국에서 계속 살아야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게 벅차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아침에 눈 뜨면 내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이상했다. 지난 일들이 전부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당시 2학기만 더 다니면 졸업장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은 학기를 마저 다니고 졸업하라는 부모님의 권유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스물일곱에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됐다. 동기들이 다 졸업한 학교는 내게 텅 빈 느낌이었다. 혼자 밥 먹고 수업 듣고, 공강 시간을 보내면서 동기들과 함께 있었을 때는 몰랐던 허전함을 느꼈다.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살아왔다. 그저 서울 안에 있는 대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에, 문과였지만 점수 맞춰서 공대에 갔다. 예전에는 동기들과 재밌게 놀면서 생각 없이 학교에 다녔지만, 회사 취직하려면 평점 3점은 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짧은 시간 안에 점수를 높이려면 내가 자신 있는 과목으로 승부를 봤어야 했다. 지금은 많이 까먹었지만, 그때는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영어가 그나마 자신 있었다. 그래서 낮은 전공 점수를 영어로 커버하려고 영어 수업을 많이 들었다. 거기서 다른과 여자 동생을 알게 됐다. 그 동생은 사교성이 좋아서 나를 잘 따랐다. 수업시간 외에 따로 만난 적이 없었지만, 졸업 후 몇 년뒤에 만나게 됐고, 그 때 즈음 부터 내 인생의 변화가 시작됐다. 과거를 되돌아보니 이 동생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 자세한 일화는 뒤에서 이야기 하려한다.


다시 학교 다니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학교 다니던 중 졸업을 앞두고 부족한 학점 채우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석사 따고 박사 준비까지도 할 수 있을 나이인데, 아직도 학교 다니고 있으니 뒤처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다니고 있는 친구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압박감을 느꼈다. 평소처럼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다. 식은땀이 나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에 카지노 바닥에 드러누웠을 때 느꼈던 증상이랑 똑같았다. 


도움을 청하려고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기억이 안 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바닥에 누워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던 거였다. 119가 왔고 병원에 실려 갔다. 넘어지면서 얼굴을 바닥에 부딪혔는지, 얼굴 왼쪽 면이 점점 퍼렇게 변해갔다. 같은 수업을 듣던 다른 과 오빠가 맞은편에 앉아있었는데, 그 오빠가 병원에 함께 와서 의사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해 줬다. 엄마께 대신 연락도 해줬다. 혼자 학교 다니다 보니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덕분에 무사히 병원에도 가게 됐고 여러모로 감사했다. 


갑자기 쓰러지게 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모든 검사를 다 받았다. 그런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아침까지 경과를 보다가 퇴원했다. 그 이후로 지하철에서도 한번 숨이 안 쉬어져서 털썩 주저앉았고, 버스에서도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서 주저앉았다. 난생처음 자리 양보받는 일도 있었다. 일반 병원에서 진료 받을 땐 병명이 안 나오더니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니 병명이 나왔다. 공황장애라고 했다. 약을 조절했고 그 이후로 한동안 괜찮아져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앓고 있는 이 병은 스트레스에 너무 취약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으로 반응이 나타났다.


그 때의 내 계획은 누가 들어도 알만한 회사에 가는 거였다. 어떤 직무로 일하게 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의 시선이 가장 중요했다. 정신이라는 내용물이 망가지고 있는 건 신경도 안 쓰고, 겉모습이라는 포장지가 망가지지 않도록 애쓰고 또 애썼다. 망가진 내용물을 가리려고 포장지에 그렇게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결국 내용물과 포장지 둘 다 망가지게 했다. 내용물이 찌그러지니까 포장지도 같이 찌그러졌다. 이렇게 찌그러진 나는 그 후로도 수년간 펴질 줄을 몰랐다. 원하는 회사, 원하는 직무가 명확하지 않았으니 지원하는 대기업마다 다 떨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 당시에는 주변에 이혼한 친구도 없었고, 정신건강의학과 다니는 친구도 없었다. 내 얘기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어떤 친구는 자기가 만약 나였다면 너무 힘들어서 자살했을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무슨 의미로 말했는지 안다. 자기는 못 견뎌냈을 일을 내가 이겨내서 대단하다는 뜻으로 말한 거라는 걸. 나름 자기 딴에는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겨낸 게 아니었다. 죽지 못해 사는 것뿐이었다. 친구가 그때 무슨 말로 나를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했겠다는 생각,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이제는 할 수 있지만,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안 죽고 살아있는 게 비참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정신건강의학과에 상담받으러 가는 사람들도 많고, 약 먹는 사람들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지역의 청년센터나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상담을 지원하기도 한다. 마음 건강이라는 명칭이 생기면서 정신질환자만 상담을 받는 것이 아니라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구라도 편하게 상담받을 수 있도록 문턱도 낮아졌다. 마음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들도 많이 생겼다. 상담받는다고 해서 불이익받는 것도 없다. 처음 증상이 나타났던 10년 전, 마음을 돌볼 수 있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때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많았다면, 외국에서의 결혼 생활이 힘들지 않았다면,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한 가지 일에 정착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평범하게 일이 흘러갔더라면 힘들진 않았겠지만, 감사하는 마음도 기쁨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말 못 할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좁았을 거로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은 게 가장 완벽한 계획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걸 얻었으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잠언 16:9 새 번역


In their hearts humans plan their course, but the Lord establishes their steps.

Proverbs 16:9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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