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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임은정 Sep 24. 2020

대인기피증에 걸리게 될 줄이야

고난이라는 선물 세트

우울증, 조울증, 전환장애, 공황장애, 무대 공포증, 대인기피증 그리고 이혼. 내가 받은 선물세트이다. 일반적으로 선물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런데 받기 싫은 선물은 기분을 안 좋게 만든다. 내가 받은 선물세트는 받자마자 기분을 안 좋게 만드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것들은 좋은 선물이라는 걸.


정신병원 퇴원을 하고 나서 한동안 괜찮다가 우울증 삽화가 시작됐다. 일도 쉬고 집에만 있으면서 사람도 안 만났다. 카톡 단체방에서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읽으면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 다들 회사 생활하면서 취미생활도 하고 잘 지내는데, 나만 세상과 동떨어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들을 읽는 게 너무 괴로워서 단체방을 나가버렸다. 이 단체방을 나가면 난 영원히 혼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들었지만, 대화를 읽는 괴로움이 더 컸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


점점 지하철, 버스 타는 것도 꺼려졌다. 평일 낮에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백수라고 생각할까 봐 거의 반년 간 대중교통 이용을 못 했던 것 같다. '나이를 저렇게 먹었는데 아직도 백수구나.' 하며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만 같았다. 집 앞 마트에 가는 것도 꺼려졌다. 나중에는 사람 눈 마주치는 것도 못 하게 됐고 사람에게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마트에 갈 일이 생기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바닥만 내려다봤다. 말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엄마께서 대신 말을 전해주는 지경까지 됐다. 많은 걸 할 수 있는 몸이지만, 많은 걸 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온종일 우는 게 일과였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예전에 했던 말과 행동들을 자책하면서 울다 보면, 해가 지고 밤이 됐다. 엄마를 붙잡고 미쳐버릴 거 같다는 말만 반복하며 울었다. 그때 기억나는 엄마의 표정을 색으로 표현하면 회색이었다.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셨다.


엄마는 친구분 가게 일을 도와주며, 내가 조증 삽화였을 때 샀던 차의 할부금을 갚고 계셨다. 죄송스러운 마음, 미칠 것 같은 마음, 죽고 싶은 마음이 매일 나를 괴롭혔다. 동생은 퇴근할 때면 내게 전화해서 저녁 먹었는지 확인하고 내 저녁밥까지 사다 줬다.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누나가 한심할 법도 한데 짜증 한번 낸 적 없고 한숨 한번 쉰 적이 없었다. 친구랑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용돈도 주는 착한 동생이었다. 정신병원에 한 번 입원할 때마다 몇백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스트레스가 많을 때마다 병이 심해졌었는데 그때마다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아빠가 힘들게 버신 돈을 축냈다.


이 모든 게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잠에서 깨어나면 난 외국에 있기를, 옆에 전남편이 있기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기를 소망했지만, 현실의 난 한국에 있었고 내 옆엔 그 사람이 없었다. 아침에 눈 떠보면 여전히 난 이혼녀였고 백수였고 각종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면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친구였는데 어쩌다 보니 모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됐다. 그 친구는 굉장히 밝은 친구였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도 대인기피증을 겪었다는 얘기를 듣고 큰 위로가 됐다. 우리는 속 얘기를 털어놓으며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평범하게 직장 생활 잘하고 별문제 없어 보이는 친구들한테는 내 얘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고 이런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지만, 자신도 힘든 시간을 겪었다고 말하는 그 친구 앞에서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 친구는 메말랐던 내게 활력을 부어 주었다. 대화하면서 대인기피증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같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그 말 한마디로 인해, 내 일상에도 회복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팠던 기억을 혼자 간직하면 싫은 선물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쓸모도 없고 짐만 된다. 쓸모도 없는데 버리기는 쉽지 않고 마음이 불편하다. 그런데 쓸모없는 선물 같기만 했던 나의 아픈 경험을 나눌 때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공감이라는 커다란 선물이 될 수 있다. 그제야 쓸모 있게 되는 거다. 고난이란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선물이다. 받고 난 직후에는 싫지만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선물. 내가 받은 고난 선물세트는 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을 공감하게 해주는 열쇠이면서 결국에는 나의 아픔도 치유해 주는 좋은 선물이 되었다.


팔다리 없이 태어난 닉 부이치치는 어린 시절 자살 시도를 3번 했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닉 부이치치는 책도 여러 권 냈고, 현재는 비영리단체인 LIFE WITHOUT LIMBS(사지 없는 삶)의 대표로 있다. 보육원에서 17년을 생활했던 김성민 님은 맞고 굶는 게 일상이었고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중학교 때에 가방에 칼을 넣고 다녔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나중에는 부모님을 용서했고 현재는 보호 종료 청년 자립을 위한 사회적 기업 '브라더스 키퍼'의 대표가 되었다.


이분들이 고난에 절망만 하며 살았다면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가진 선물은 오직 나만이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그건 어느 날 용도에 맞게 쓰이는 날이 올 거다.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중에 그것 덕분에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때가 온다고 믿는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시편 119:71 새 번역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so that I might learn your decrees.

Psalms 119:71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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