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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임은정 Sep 15. 2020

또 정신병원에 입원할 줄이야

피난처 같은 감옥

벌써 세 번째 입원이었다. 예전에는 강제로 끌려가서 입원당했고, 이번엔 제 발로 갔다. 그토록 가기 싫고 감옥 같던 곳이었는데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그곳이 마치 피난처로 느껴졌다. 세상과 단절될 수 있는 곳, 폐쇄병동의 생활이 시작됐다.




"우리 회사에서 사람 뽑고 있는데 너 일해볼래?"


학교를 졸업하니 스물여덟이 되어있었다. 친구가 어느 날 솔깃한 제안을 했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들어보지도 않고 알겠다고 했다. 졸업 후 계속 백수로 지내다 보니 친구랑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그 제안이 솔깃했던 것 같다. 알고 보니 그 일은 보험설계사 일이었다. 같은 회사였지만 그 친구는 사무직이었고 나는 영업직이었으니 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한국을 떠났을 때 난 스물셋이었고 외국에 있는 동안 해본 일은 편의점과 옷 가게 알바가 전부였다. 한국에 와서 학교를 졸업한 후 나이는 스물여덟이 됐어도 사회 초년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보험설계사로 일했던 게 첫 직장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회사를 학교 다니듯 다녔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언니 오빠라고 불렀고, 술이 덜 깬 채로 와서 교육을 듣기도 하고, 교육 시간에 조느라 바빴다. 지점장님을 친구 대하듯이 대했고, 친구 일하는 자리에 찾아가서 근무시간을 방해하기도 했다. 자신감에 차 있었고 기분이 들떠있었고 말이 많았고 산만했다. 사소한 일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회사에 다니기엔 부적절한 옷차림으로 다녔다. 충동적으로 새 차도 샀다. 돈을 개념 없이 쓰기 시작했고 사람들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한동안 인지하지 못했다. 또 조증 삽화가 찾아왔다는 걸.


보험회사는 늘 실적의 압박을 줬지만, 엄마의 인맥 덕분에 상위권에 있을 수 있었다. 실적이 올라갈 때마다 이름 옆에 스티커가 늘어났고, 스티커가 많아질수록 신이 났다. 마치 스스로 다 해낸 것처럼 으스대며 다녔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실적 저조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냐고. 지금 생각하면 그분을 포함한 회사 사람들과 친구와 부모님께 너무 죄송스럽고, 가끔 그때가 떠오르면 숨고 싶어 진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나 자신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남의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청각장애인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회사에서 역할극을 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자세히는 기억 안 나지만 두 명이 짝을 짓고 한 명은 보험 가입을 거절하는 고객 역할, 다른 한 명은 그런 상황에서 대처하는 보험 설계사 역할을 맡고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거였다. 보통의 나는 내성적이고 무대 공포증이 있는 사람인데 그때는 조증 삽화여서 자신감이 넘쳤다. 두려운 게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역할극을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차례가 되고 나서 앞으로 나가자마자 굳어버렸다.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횡설수설하다가 자리로 빨리 돌아와 앉았다. 그때부터 갑자기 사람들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창피해졌다. 그 이후로도 주목받는 일들이 생기면 목소리가 떨렸고 얼굴이 경직됐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졌다.


인터넷으로 내 증상을 찾아봤다. 자가진단 테스트에 나온 대부분의 증상에 내가 해당하는 것 같았고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멍했다. 엄마께 전화해서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일정을 다 취소했다. 회사에는 이유를 얘기하지 않고 개인 사정으로 못 가겠다고 했는데 자꾸 이유를 물어보면서 늦게라도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했다. 친구한테는 정신병원 입원해야겠다고 사실대로 얘기하니, 앞으로 회사 일은 어떻게 할 거냐고 계속 물어봤다. 다른 친구 따라서 몇 번 갔던 교회에서는 교육 수료식이 있었는데 참석할 수 있는지 연락이 왔다.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운데 여기저기서 답을 요청하니까 미쳐버릴 것 같았다. 엄마께서 나랑 병원에 가려고 집에 오셨다. 엄마가 운전하면 내 걱정 때문에 사고 날 테니 다른 사람이 운전해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난리 치느라 병원에 늦게 도착했는데 의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한 마음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내 머릿속 답답함이 눈물로 터져 나왔다. 의사는 내게 안정이 필요할 것 같다며 입원실을 잡아주었다. 그렇게 나는 모든 것에서 잠적했다. 무책임하게.


언제나 발악하면서 도착했던 정신병원이었는데 이번에는 순순히 얌전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폐쇄병동은 시끌시끌한 내 머릿속을 잠시나마 조용하게 해 주었다. 피난처 같았다. 그런데 피난처가 금방 감옥처럼 느껴졌다. 여러 가지 제약들이 나를 또 억압했다. 일반 병동과는 달리 폐쇄병동은 다른 층으로 나갈 수 없도록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 한 공간에서만 계속 생활해야 하고 그 공간에서만 돌아다닐 수 있다. TV를 보고 책을 읽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답답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병원 화장실에서 자해하다가 붙잡혀 오는 환자도 있었고, 자꾸 옆에서 큰소리로 야한 얘기 하는 환자도 있었다. 독방에서 계속 시끄럽게 소리치는 환자도 있었다. 정신온전한 사람이 들어오면 미쳐서 나가게 되는 곳일 거다. 누구나 우울한 날이 있을 수 있지만, 조울증 환자는 너무 우울해 보이면 안 된다. 우울증 삽화로 보기 때문이다. 누구나 기분 좋으면 들뜰 수 있지만, 조울증 환자는 너무 기분이 들떠 보이면 안 된다. 조증 삽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빨리 퇴원하고 싶다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 이게 정말 환장하는 일이다.


정신질환자로 낙인찍히는 건 마치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범죄 저지르면 재범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한번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나니 내게 편견이라는 수갑이 채워졌다. 내 말과 행동에 따라 판단당하고 제지당했다. 이 수갑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를 표현하게 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나면 마음에 평안함이 찾아올 줄 알고 제 발로 들어왔다. 그런데 세상과의 차단이라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몸은 피난시킬 수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는 피난시킬 수 없었다. 괴로웠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쯤 이 괴로움이 끝날지 알 수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힘이시며, 어려운 고비마다 우리 곁에 계시는 구원자이시니,

시편 46:1 새 번역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n ever-present help in trouble.

Psalms 46:1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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