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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임은정 Oct 07. 2020

사람을 두려워하게 될 줄이야

흉기 같은 말

"초등학생도 그것보단 잘하겠어요!!!"


지나가던 학생들과 일하던 직원들이 얼음이 되었다. 나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신이 멍해졌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날카로운 말이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몇 달간 했던 보조 출연 알바는 원하는 날짜에 하고 싶은 촬영만 골라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런데 겨울이 되니 실내 촬영은 괜찮았지만 야외 촬영은 추워서 힘들었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동네 학원에서 올린 구인공고를 봤다. 학원 업무를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일이었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와서 찾아갔는데 데스크 직원이 나보고 잘못 찾아오신 것 같다고 말했다. 연락받고 온 거라고 하니까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부원장님이 오셔서 면접을 봤다. 면접 도중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시더니, 여기는 전부 여직원들이라 특히 말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면접에 합격해서 일하게 됐는데 첫날부터 분위기가 왠지 싸했다. 그때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학원은 입시 학원이었는데 학생 수가 많았다. 대 강의실에서 수업이 있는 시간에는 아수라장이었다. 아직 학생들 얼굴도 익숙지 않은데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우르르 들어오면 입구에서 출석 체크 하며 동시에 교재도 나눠줘야 했다. 지금은 대부분 전자기기로 편하게 출석 체크하지만, 그때는 일일이 수기로 출석 체크 해야 했다. 처음이라 혼자 하는 게 버거워서 버벅거리자 내가 면접 보러 왔던 날 의아해했던 직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혼나고 나니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출근하는 길에 매일 기도를 했다. 오늘은 그 직원이 내게 소리 지르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기도라기보단 다짐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신은 없다고 생각했었고 모든 일은 내 노력에 따라 달린 일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주문 외우듯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그 다짐은 늘 실패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직원에겐 만족스럽지 않았나 보다. 어느 날 또 내게 소리를 질렀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부원장님께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다. 나를 채용한 이유는 그 직원을 해고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그 직원은 전부터 뭔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 지르곤 했다고 한다. 심기가 불편하면 무단으로 조퇴한 적도 있다고 했다. 부원장님이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직원에게 말 한마디 없이 채용공고를 올린 거였다.


그 직원은 학원에서 오래 일했고 학원의 전체적인 흐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원장님은 다른 지점도 왔다 갔다 하시느라 자리 비우시는 때가 많아서 실질적인 학원 업무에서는 그 사람이 실세였던 거다. 그간 부원장님과 그 직원 사이에 많은 신경전이 있었던 듯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나니 면접 보러 온 날 그 직원이 왜 의아해했는지 알게 됐다. 처음 입사하고 나서 부원장님이 지시한 대로 일을 했는데 그녀가 버럭 화를 내며 자기가 지시하는 대로 하라고 했던 것도 떠올랐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채용공고가 올라갔고, 내가 면접 보러 왔으니 황당했을 거다. 갑자기 들어와서 자기 일을 인수·인계받는 상황이 얼마나 싫었을지 이해가 됐다. 나는 중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고래 싸움에 등 터지고 있었다.


부원장님은 그 직원이 소리 지르며 학원을 소란스럽게 만드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며 내가 어서 인수·인계받고 그녀의 자리를 빨리 대신하길 바라셨다. 그런데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받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 직원은 일을 제대로 가르쳐 주려고 하지 않았고 계속 잡다한 일만 시켰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대놓고 큰소리로 내 욕을 하고, 나만 쏙 빼고 모든 사람에게 간식을 나눠 주는 사람이었다. 왕따 당하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고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를 따돌리고 상처 주는 사람과 잠시 일한 것도 이렇게 괴로웠는데, 학교나 회사에서 오랫동안 왕따 당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만둔다고 하니 한 직원이, 여기서 못 버티면 어디 가서도 못 버틸 거라며 나를 타일렀다. 그 말을 들으니 여태까지 제대로 직장 다닌 적이 없는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정말 다른 곳에서도 못 버틸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부원장님과 어떤 선생님이 밥까지 사주시며 계속 일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더 일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 직원과 일하는 건 숨 막히는 일이었다. 소리칠까 봐 계속 긴장 상태에서 일하다 보니 심장이 벌렁거리고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또 공황장애가 와서 쓰러질까 봐 무서웠다.


말이라는 건 참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는 형체가 없지만 강력한 힘이 있다. 흉기 없이 말 한마디로도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엄마께서는 스트레스받아서 또 정신병원에 입원하면 월급보다 병원비가 더 나온다며 그만두라고 하셨다. 그렇게 두려움에 쫓겨 또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너희를 위로하는 이는 나, 바로 내가 아니냐? 그런데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며,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는, 너는 누구냐?”

이사야 51:12 새 번역


“I, even I, am he who comforts you. Who are you that you fear mere mortals, human beings who are but grass,

Isaiah 51:12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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