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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모모씨 Oct 31. 2022

난 내 앞에서 우는 사람이 좋아

“난 내 앞에서 우는 사람이 좋아”

 

 

그 날의 술자리 주제도 결국은 ‘사랑’이었다. 나라 얘기로 시작해서 취직,환경,부모님 등 별 얘기를 다 해봤지만 역시나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린 독점적인 소유를 전제한 사랑을 이야기 했다. 요지는 연민이 사랑이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어떠한 사랑이건 연민이 전제 돼 있다는 식상한 결론으로 그 날의 술자리는 끝이 났다.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조차 어딘가 하나는 부족하다. 완벽한 것 같다가도 삐걱댄다. 원래 모든 인간이 어려움 하나 정도는 있겠지만, 유독 주인공들의 어려움은 극적 전개에 꼭 필요하다. 사랑의 진척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 오는 날에 트라우마가 있는 주인공이 운전을 하고 있으면 갑자기 비가 온다. 그 때 항상 그를 도와 줄, 그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한 다른 주인공이 나타나서 그를 도와준다. 당연히 그들의 사랑은 깊어진다. 약간은 상투적인 이런 전개의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상투적인 데도 계속 그런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아니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상대방의 취약함을 알 때 그래서 이를 도와줄 수 있을 때 더욱 사랑할 수 있어서가 아닐까.

 

 

어떠한 인간도 완벽하지 않다. 그렇기에 완벽한 ‘신’이란 존재를 만들어 내어 이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간끼리 협력해도 무엇인가 불안정하여 신을 믿는 마당에, 인간 홀로 살기에는 너무 힘든 세상이다. 로빈스 크루소 같이 의도치 않게 무인도에 고립된 경우 살수야 있겠지만, 같이 협력해서 살아 갈 때 훨씬 더 큰 효용을 누리는 건 사실이다. 경제학자 리카르도도 말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잘난 국가더라도 비교우위를 따진다면 타국과 교환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어쨌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자신이 의지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한다.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사회화 과정을 겪고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사회 복지 전문가 브레네 브라운은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사례를 모아 분석한 결과, 두 그룹 간의 차이점을 ‘용기’라고 말했다. 라틴어로 심장을 뜻하는 ‘cor’이 어원인 용기(courage) 는 내가 누구인지 진심을 다해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불완전할 용기가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이들과 연결 됐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줄 때, 타인과 연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취약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포용했다. 그들을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들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취약성이 수치심,두려움, 사투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쁨, 창조성,소속감,사랑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을 사회와 사회 속 타인들과 협력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기술발전이 된다 할지라도 인간 혼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껌 하나를 만들더라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내가 번 돈 1000원으로 껌을 산다 해도, 수 많은 사람들이 없으면 우린 껌 하나도 씹지 못할 것이다. (내가 번 돈조차 타인이 있기에 가능하다) 여러 기업이 더 맛있는 껌을 더 싸게 팔기 위해 피 터지게 경쟁하는 사회일 수도 있지만,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협력해서 얼굴도 볼 일 없는 사람들을 위해 껌을 만드는 사회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껌을 만드는 일은, 인간에게 너무 힘드니까. (물론 노동 구조 안에 내재된 불합리함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한다.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바로 실전인 삶에 뛰어든다. 더욱 더 완벽할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신은 우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게 만든 게 아닐까. 치대면서 서로 돕고 살라고 말이다.

 

 

나는 나와 같이 어딘가는 취약한, 조금은 모자란 사람을 사랑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정과 자애와 친절과 자비에 대한 모든 호소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정의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하나이며 같은 존재라는 인식”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다. 나약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나약하기에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이에 조금 더 솔직할 때 우리의 삶은 조금 더 완전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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